[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19

이병길 2021. 2. 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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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항일운동의 싹을 틔운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다

[이병길 기자]

▲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 부산지역의 조선인이 다닌 상업학교인 부산공립상업학교이다. 이 건물은 1916년 대화재로 전소하였으며 학교 관련 자료 역시 불타 당시의 사료가 없다.
ⓒ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부경근대사료연구소)
개성학교, 부산상업학교로 바뀌다

1912년 4월 1일 박재혁과 정공단 아이들은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는 박기종 등이 설립하여 1896년 3월에 개교한 개성학교(開成學校)에서 유래했다. 개성학교는 일본인 교장 아라나미 헤이치로(荒浪平治郞)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는데, 그는 천성이 호방하고 일본 낭인의 대륙적인 성격을 띠어 식민지 교육에 앞장선 부분이 없지 않았다. 1897년 개교 직후 학교 운영 경비가 부족하여 보조사립학교로 지정되어 한국 학부 1,200원과 일본 외무성 1,800원의 보조금을 받아 운영되었다. 1899년 노세 다츠고로(能勢辰五郞) 부산 영사 때 외무성 보조금이 3,000원으로 증액되고 학부의 1,800원을 합해 총 4,800원을 받았다. 분교를 설립하여 부산뿐만 아니라 경남도 일대에 일본어 교육을 확대하였다. 개항 시기라 일본어는 조선 근대화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교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교육했다. 구관지교, 부산진지교, 밀양 개창학교, 동래 개양학교, 대구 달성학교, 경주 계림학교, 기장 일어학당, 경북 청도 개명학교, 울산 개진학교 등으로 지교와 분교(보조학교)가 확대되었다. 1907년 보통학교령 공포로 지교와 분교는 지역의 보통학교로 전환 또는 흡수・통합되었다.

개성학교는 1899년 11월 마산포로 수학여행을 하고, 1900년 8월 교장 아라나미가 인솔하여 학생 3명이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가사키에 왕복 8일간의 수학여행을 하였다. 우리나라 해외 수학여행의 효시라 하겠다. 하지만 수학여행은 오늘날 선진지 견학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선진문명을 보여줌으로 일본에 대한 동경과 일본 문화의 우월성을 한국인에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여행은 추억으로 남지만, 또 한편 동경과 호기심을 각인시킨다. 부산상업학교도 개성학교와 마찬가지로 수학여행을 실시했다. 1912년부터 1921년까지는 주로 국내 여행을 하였고, 1922년에 7일간 일본 동경 여행, 1928년은 국내와 일본 동경 여행, 1930년 이후는 일본 방면으로 수학여행을 실시하였다.
  
일본인 학자 이나바 쯔기오[稻葉繼雄]에 따르면 개성학교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긍정적 평가는 "개성학교의 창립이야말로 부산에서의 근대식 교육, 즉 신교육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부정적 평가는 "일어 보급의 척후(斥候)"였다는 통렬히 비판하는 견해이다.    한일강제 병합 이전 통감부 시절에 이미 일본은 모든 관공립학교 및 일부 사립학교(서울의 중동학교, 숙명여학교, 서울사범학교, 보성전문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다. 합병 후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고 동화교육이 추진될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을사늑약 이후 일본어 학교의 학생들도 국가의 존망에 즈음하여 편안히 수업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일제히 울면서 교문을 나서는 일도 있었다. 보통학교에서의 일본어 교육은 한국인의 국민성을 말살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통감부는 일본과의 교섭이 증가하는 정세에서 일본어를 알고 모르는 것은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일이라며 처세에 적응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그래도 관공립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중류 이하 계층의 아이들이 다녀 '빈민학교'라고까지 불렸다.

1908년 대한매일신문은 「대한교육계의 비관」이란 논설을 싣고 일본어 교육을 통박했다. 즉 일본어 교육은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지금 많은 왜국인들이 갑자기 그 기관들을 모아 일본어·일본문장·일본의 정신·일본의 사고 그밖에 각종 일본의 교육정신으로, 연약한 어린 두뇌를 혼란케 하여 조종해나가면, 만약 이 나라에 영웅이 태어나도 이것은 일본의 영웅이지 한국의 영웅이 아니고, 지사(志士)가 태어나도 이것은 일본의 지사이지 한국의 지사가 아니며, 정치가 ·학문가가 태어나도 이것은 일본의 정치가·학문가이지 한국의 정치가·학문가가 아니다. 한국인은 그 자제(子弟)를 앉은 채 잃게 될 것이다."

근대화 혹은 입신출세를 위한 일본어 학습으로 일본어 소통 가능한 사람은 병합 전에 조선인의 1% 정도였다. 일본어의 구사는 지배계층으로 가는 사다리이기도 했다. 한편 입신출세와 근대화의 수단이었던 "일본어는, 한국인에게 침략자의 언어가 되어, 이를 배척하고 스스로의 문자・언어 교육 교육을 활발히 하는 것이 반침략・애국의 한 방도"가 되었다. 그래서 사립학교나 야학, 심지어 서당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의식있는 학부모들은 보통교육이 일본인이 되는 것이라 여기며 서당에 보내기도 하였다.

개성학교는 일제의 통감부 통치 시절인 1907년 사립부산일어학교로 개칭여 운영하다가 학교 경영이 어려워 1909년 3월 국가에 헌납했다. 1909년 4월 공립부산보통학교(현 봉래초)와 공립부산실업학교로 분리되었다. 부산실업학교의 초대 교장은 동래부윤 김창한이 겸임하며 1909년 6월 4일에 정식 개교하였다. 한일강제 병합 후 1911년 11월 1일 부산공립상업학교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는 현재의 봉래초등학교 정문 남쪽 직선 골목 끝자락 150m 언덕에 있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와 후쿠시 교장
 
▲ 후쿠시 교장 기념 도서관과 흉상 부산상업학교에서 헌신적으로 교육활동을 한 후쿠시 교장을 많은 제자들은 기억하고 있어 그를 기념하는 도서관과 흉상을 동창회에서 1934년 세웠다. 출처: 朝鮮新聞(1934.10.30)
ⓒ 이병길
 
사립이었던 개성학교는 박재혁이 입학하기 전인 1909년 4월에 공립부산실업학교를 거쳐 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가 되어 실업학교로 탈바꿈하였다. 공립이라 학비 부담은 다소 적었다. 부산상업학교는 3학년제로 교원 7명, 3개 학년 학생 129명으로 출발하여, 1912년 3월 제1회 졸업생 23명을 배출하였다. 학교는 민족교육을 강조하기보다는 일본식 교육을 통해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학생들은 3년 동안 수신(3시간), 상업(32시간), 영어(4시간), 일어(31시간), 한국어 및 한문(5시간), 지리(9시간), 수학(19시간), 이과(6시간), 체조(3시간)를 배웠다. 학년별로 보면 주당 상업과목을 1학년 9시간, 2학년 10시간, 3학년 14시간 총 32시간을, 일본어는 1학년 18시간, 2학년 7시간, 3학년 6시간 총 31시간을 이수하였다. 하지만 국어 한문은 주당 2시간 정도였다. 당시 일본어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이는 부산지역이 일본과의 인적 물적 교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문을 보면, 1911년 3년제로 교원은 일본인 5명, 조선인 1명으로 학생은 총 110명이었으며 신입생은 77명, 졸업은 23명, 중퇴자는 35명이었다. 학교 운영 경비는 총 10,560원이었으며 총 1,026평에 건물은 219평이었다. 1912년 6월 부산공립상업학교의 총학생은 141명이며, 교원은 일본인 5명, 조선인 1명이었다. 입학생은 61명이고 그해 졸업생은 23명이었다. 12월 1학년 53명, 2학년 41명, 3학년 30명으로 총 124명이 재학 중이었다. 입학생은 67명, 졸업은 25명, 중퇴자는 23명으로 학교 총경비는 8,360원이 소요되었다. 부지는 1,026평이며 건평은 215평이다.

1915년 신문 보도를 보면, 신입생 입학은 추천 입학과 시험입학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총 60명을 모집하였다. 추천 입학 자격은 다음과 같았다. 연령 12세 이상의 남자로 4년의 보통학교 졸업 또는 그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자, 신체가 건강한 자, 재학 중 학비의 계속 납입이 확실한 자 등 세 가지 자격을 가지고 품행이 방정하며 학술이 우등한 자로 공립보통학교장이 추천한 자는 입학시험 없이 입학을 30명 허락하였다. 그 외 30명가량은 입학시험을 보아 뽑았다. 입학 청원서 제출 기한은 3월 31일이었다. 입학 지원자는 입학 청원서에 이력서를 첨부하여 시험을 받고자 하는 학교에 제출하였다. 입학시험은 보통학교 졸업 정도로 시험과목은 국어(일본어)와 산술, 조선어 및 한문이었다. 시험은 3월 31일 오전 10시부터 실시되었다. 시험 장소는 부산공립상업학교와 경남의 각 공립보통학교 그리고 대구, 상주, 경주, 성주, 광주, 목포, 순천, 여수의 각 공립보통학교였다. 구두시험과 체격검사는 4월 13일 오전 9시부터 부산상업학교에서 실시하였다. 학생들은 전국에서 응시하였고 지방의 입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1911년에는 영주동의 동래부 구청사를 불하받아 사용하였다.

정공단 아이들이 부산공립상업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1912년에서 1914년까지 일본인 교장 1명, 일본인 교사 4명, 한국인 교사 1명이 있었다. 일본인은 교장 후쿠시 도쿠헤이(福士德平), 교사 사카네 히사토(坂根久人), 이와바야시 키노스케(岩林喜之助), 사카이 카타로우(坂井嘉太郞, 서기 겸함), 아라타 한이치로(新田繁一郞)이었다. 한국인 교사는 1912년에 김치련(金致鍊), 1913년과 14년에는 김장태(金璋泰)가 있었다. 1914년 8월에 상업, 부기 주산 등을 담당하는 오오타 타케사부로(太田武三郞) 교사가 왔다. 이들 일본인은 1911년 부산공립보통학교의 교장과 교사를 겸임했었다. 상업학교에서 후쿠시 교장은 수신, 법제, 경제를 담당하고, 사카네 히사토는 영어와 대수 등을, 아와바야시 키노스케는 상업 과목을, 사카이 카타로우는 서기를 겸하며 일본어와 작문 등을, 아라타 한이치로는 이과와 체조, 산술, 작문 등을 가르쳤다. 한국인 교사는 일본어, 조선어와 한문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일본어 통역사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일본인 교사는 조선어를 할 줄 몰랐다. 한국 학생과 교사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사용하였지만 일본교사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인 교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일본인 교장 후쿠시 도쿠헤이[福士德平, 1870~1936)는 동경고등상업학교 출신이다. 1909년 4월 1일 대한제국 정부의 초빙을 받고 일본 후꾸이껜(복정현) 쓰루가(돈하 敦賀)공립상업학교 교장을 하다가 부산으로 왔다. 38세 때 공립부산실업학교 겸 부산공립보통학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1년부터 부산공립상업학교 교장을 1930년 1월까지 21년간 근속하여 반생을 학교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일제강점기 부산상업학교는 그의 힘으로 유지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기억하는 제자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영주동에서 서면으로 학교 이전도 추진하여 실현하였다. 후쿠시 교장은 부산공립상업학교의 내용이나 외관상 완비된 것은 모두 선생의 공적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로 학교에 헌신하였다. 일본 총독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교육공로자로 1923년 5월 19일 표창하고 400원을 수여하였다. 그의 인간상은 교육자로서의 근엄한 일면과 함께 자애로운 인간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후쿠시 교장은 졸업생의 취직을 위하여 전국의 관청, 은행, 회사, 상점 등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신용이 없다고 모두가 상대 안 하자 졸업생들의 재학 중 부기, 습자, 작문 등의 성적물을 들고 가서 보여준 끝에 졸업생 전원을 취직시키기도 했다. 매년 2학기 때부터 앞으로 다가올 졸업생의 취직 문제에 대비하여 전국 각 기업체를 순방, 취직의 길을 미리 열어 놓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매년 졸업생이 원하는 대로 모두 취직자리를 알선해 주었는데 그것도 비교적 조건이 좋은 곳만 골라잡았다. 그리고 이미 취직한 사람이 무슨 사정으로 사직했을 경우, 그 사람이 다시 새로운 취직처를 원하면 후쿠시 선생은 딴 자리를 알선해 주곤 했다.
후쿠시 교장은 졸업생의 취직 알선은 물론 자기의 알선으로 취직이 되어 근무 중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일일이 그 직장으로 찾아 직접 근무상태를 두루 살펴 근무상의 난점과 애로 등을 알아보고 그것을 재학생 훈육과 재학생의 장래의 진로에 참고로 삼았다. 1, 2회 졸업생 48명 중에서 관리 2명, 교원 1명, 기타 4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이 상업과 금융업 계통에 취업을 하여 우리나라 공립 실업학교의 효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유학생은 2・8독립선언에 참가한 김철수가 유일했다.

후쿠시 교장은 근엄한 가운데 다사로운 인정으로 졸업생이나 재학생을 위한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다. 선생에겐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수시로 학생들을 대하는 자리에서 "너희들이 곧 모두 내 친자식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후쿠시 교장이 퇴임하고 1936년 사망한 후 그의 공적을 기려 동창회에서는 개교 25주년을 행사하여 1934년 7월 기념 도서관을 세우고, 등신대의 흉상을 10월 제막하였다. 비록 일본인 교장이었지만 제자 사랑은 지극히 깊었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자로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며, 그 자신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교육활동을 했을 것이다. 즉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긍정적인 활동이나 언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일본인 개인은 좋은 사람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대상인 식민지 조선인에 대해서 동정심을 베풀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나 조선의 독립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인은 긍정할 수 있으나 그 국가나 정치인은 긍정할 수 없는 시대였다.

당시 학교의 교사는 단순히 학생들에게 상업적 지식을 전수했다. 학생들에게 교과목에서는 좋은 선생일지 모르지만, 민족 교육적 차원에서는 나쁜 선생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교사는 민족정신을 가르치기보다는 일본인 교사의 보조적 역할 이상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민족주의적 감화를 줄 교사는 없었다. 합병에 따른 일본 인종의 우월성과 조선 인종의 열등성을 강조할 뿐이었다. 사회진화론적 입장에서 약육강식의 논리를 주입하여 조선인의 열등감을 심어주고 열심히 노력해서 일본인같이 되라고 훈화할 뿐이었다. 열등 민족인 조선은 우수 민족인 일본에게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일본어로 진행한 수업은 자연히 학생들이 조선어 사용에 제한을 가져왔다. 보통학교부터 배워온 일본어였기에 학생들은 불편하지만, 수업은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일본어 교사가 자유로이 학생들과 대화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어로 대화를 하면 배일적이고 항일적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다그치는 일이 발생하였다. 자연 학생들은 교사들과 친밀한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오택(오재영)이 보기에, 학교는 일본집 점원 양성소에 불과하였고, 부근 가난한 집 자제가 부득이 점원 취직을 목적으로 입학하는 곳이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는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한국의 열등성을 심어주고 한국인이 일본인이 되는 동화정책의 학교였다. 조선인의 민도가 낮고 고도의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실용교육을 명분으로 부산공립상업학교를 허가했다. 나라가 망하였지만 먹고사는 일은 개인의 문제였다. 학생들은 배워서 생계를 유지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일본인 금융회사와 상점에 대부분 취직을 하였다. 친일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생계형 친일도 있었지만 부왜적인 반민족행위를 한 친일분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 중에는 친일적인 학생이 있었을 것이지만 항일적인 학생들도 있었다. 모든 학생이 동일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일본에 대한 입장은 달랐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에 따라 졸업 후의 진로는 달랐다.

부산 영주동의 부산공립상업학교는 1916년 3월 8일 오후 8시 30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교사가 전소하였다. 12월 신축 교사는 목조단층 건평 147평으로 교실 3칸, 부기실, 실습실, 교장실, 직원실 그리고 부속건물 2동이었다. 부산진공립상업학교(1922년)는 1923년 부산 서면으로 이전하였다. 학교 신축공사 기부자 중에서 개성학교 출신이자 전 시종부원경인 울산 송태관(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친) 24,550원, 백산상회의 경주 최부자 최준과 무역상이자 경남신문 설립자인 울산의 김홍조(김정훈의 장인) 1,500원, 백산상회의 의령 출신 안희제 1천원, 상해 임정 재무차장을 한 양산 윤현진의 형이자 백산상회의 윤현태 1천원, 그리고 양산 김정훈의 숙부인 김교환 300원 등이 있다. 총 33,550원이었다. 동창생 중에 1회 추문수(김영주의 동생 김영찬의 장인)가 1천원을 내었고, 정공단 아이들 중에서 양성봉과 백용수 50원, 최천택과 왕치득 30원을 기부하였다. 학교는 그 후 부산제2공립상업학교(192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50년), 개성고등학교(2004년)로 이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항일운동이 싹튼 공립부산실업학교의 대붕회

1912년 4월 1일 박재혁(18세), 최천택(17세), 오택(16세)은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박재혁은 부산진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지 1년 후였고, 최천택은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오택은 사립명진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학하였다. 재혁이 졸업 후 바로 입학하지 못한 것은 부친의 삼년상과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최천택과 오택의 경제적 상황은 박재혁보다 긍정적이었다.

오택은 원래 상업학교 진학보다는 일본 유학을 원했다. 명진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려고 준비하던 중 부산상업학교에 시험 삼아 입시를 했는데 불행히도 합격하였다. 오택의 부모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외국 유학은 시기상조이다. 졸업 후에 일본 유학하러 가는 것이 좋겠다며 만류하였다. 당시 오택이 상업학교 진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당시 상고는 일본 집 점원 양성소에 불과하였고, 부근 빈민 자제가 부득이 점원 취직을 목적으로 입학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학교에 다니니 자연 오택은 일어 학습에도 등한하고 주산 부기는 염두에 두지 않으니 1년 잘 놀고 다음 해 봄에 상경하여 의전(醫專)이라도 입학하는 수밖에 없다고 학과에는 유의치 아니하였다" 오택은 부상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학업을 등한시하여 3학년 때 중퇴하였다. 그는 경성의전에 다니고 싶어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입학 후 얼마 후 박재혁, 최천택은 오택은 만나게 되었다. 눈썰미가 좋은 오택은 전날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서 만난 일을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안 이야기며 보통학교 시절을 서로 나누었다. 모두가 외동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재혁과 천택이는 이미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라 장남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도원결의하듯이 의형제 결의를 하였다. "박의사와 오택, 최천택 3인은 피차가 독자였기에 좌천동 증대산에 올라가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고 부모상을 당할 때는 같이 상주 노릇을 하자고 모든 일에도 뜻을 같이하자고 굳게 맹세하였다." 세 사람은 각기 나이가 차이가 났기에 박재혁이 큰 형 노릇을 하였다.

부산상업학교는 한국 학생이 다니는 실업계통 학교로 대부분 교사가 일본인이었고 당시에는 일본 친화적 교육내용이었다. 당연히 학교 내에서는 친일적 경향과 반일 항일적 경향의 학생들이 있었던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상업학교는 반일 항일적 학생운동 단체가 암암리에 조직되어 일제강점기 내내 끊임없는 부산지역 항일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부산이 가진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대붕회(大鵬會)는 1910년 국권 피탈 소식을 들은 공립부산실업학교(1909~1910)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변상태(卞相泰), 최기택 등 6명이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대붕회는 한일합병 직후 탄생된 부산지역의 초기 비밀 결사였다. 현재 대붕회의 정확한 활동 사항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학생 비밀 결사의 경우 보통 교내 독서회 조직, 강연회 등을 통한 사상 전파나 국내에 잠입한 애국지사나 독립 단체 등의 지지 세력으로 활동하였으므로 대붕회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붕회를 조직했던 변상태(卞相泰, 1889~1963)는 경남 창원 출생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명교, 황병기 등과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공립부산실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최기택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부산의 불락산(현 부산시 동구 초량동 뒷산)에 올라 조국 광복을 위해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1915년 일본인이 한국 소녀를 욕보인 사건이 발생하자 부산에서 노동자 200명을 인솔하여 인본인 가옥을 파괴하여 보복하였다. 그는 1915년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17년에는 남형우, 안희제 등 50여 명의 동지와 비밀 결사 '대동 청년단(大同靑年團)'을 결성하여 모험 부장이 되었다. 임시정부에 군자금 1만 5,000원을 송금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고향인 진전(鎭田)으로 와서 동지 권영대, 권태웅, 권태선, 백승인, 황태익 등과 함께 중종 선실(中宗先室) 일친재(日親齋)에서 4월 3일의 삼진의거를 계획하고 우선 3월 28일의 고현 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4월 3일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민족(自由民族)이며 자유국의 국민(國民)이다. 일본의 간여는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라고 외치며 시위대 군중 7천여 명과 함께 시위하였다. 1919년 3월 28일과 4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진동면·진북면·진전면 세개 면의 연합 시위인 삼진의거였다.

4·3 삼진의거는 지역의 지식인 학생 농어민 등이 앞장서서 일으킨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당시 마산부와 창원군 지역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족운동에 대한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8명이 일본군이 쏜 총탄에 순국(殉國)하였다.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묘주(高昴住)·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8의사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삼진 지방의 만세 시위 주동자로 검거된 변상태·변종열(卞鍾悅)은 징역 2년, 권영조·권영대·변상섭·구수서(具守書)·권태용(權泰容)·김영종(金永鍾)·변상술(卞相述)·변상헌(卞相憲)·변우범(卞又範)은 징역 1년 형의 옥고를 치렀고, 이들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권오규(權五奎)·권태선(權泰璿)·백승인(白承仁)·서정규(徐正奎)는 징역 6월 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들에게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 변상태 선생 기적비  변상태 선생은 대붕회를 조직하고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하고 삼진의거를 주동하였다.
ⓒ 이병길
변상태는 1921년 의령에서 불심검문 하는 일본인 순사를 살해하고 일본 천황을 암살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44년 진주에서 이주현, 구여순, 장두관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고려 구국 동맹'을 결성하여 지하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부산상업학교를 입학한 학생들은 부산, 울산, 양산, 밀양 등지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지역 사정을 교류하였고, 알음알음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일운동 소식을 서로서로 쉬쉬하며 알렸다. 그중에는 소식에 정통한 학생이 있었다. 광복단 활동을 하였던 최천택도 그 중의 한 명으로 당시의 정세와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알려주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회 졸업생, 김철수
 
▲ 김철수 양산 상삼마을 출신으로 동경 2.8독립선언으로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와 청년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로 해방후 경남도지사를 지냈다.
ⓒ 이병길
  
정공단 아이들이 입학한 후 유일하게 일본으로 유학을 간 선배가 있었다. 양산 상북면 상삼마을 출신으로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김철수(1896~1977)이다. 그는 부산공립상업학교 2회(1913년) 졸업생이다. 그가 10대 초반일 때, 양산군에 들어온 일본군대가 조선인 청년 자위대와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살육했을 뿐만 아니라 한학자였던 아버지 김상형(金商炯)마저 잡아다가 항일투쟁의 배후조종자라 하여 초죽음이 되도록 고문한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1908년 성천마을에서 서병희 의병이 일본인을 참살하고, 김병희·교상 부자가 상삼마을에서 일본군과 교전에 따른 마을 주민의 살육 현장을 그는 기억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항일정신의 싹이 텄다. 그는 "우리 집안과 우리 마을이 당했던 그 수모는 나의 어린 가슴을 멈추게 하였고 그 속에 항일의 씨앗을 심어 나의 평생을 독립투쟁과 국권회복의 힘이 되게 해주었다. 김철수는 김교상의 아들 김정훈보다 1살 적었고 바로 길을 경계로 집이 이웃해있었다. 그들은 공통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달랐다.
상삼마을의 참극으로 부친은 그를 기장에 있는 자형 박인표 집으로 보냈다. 박인표(朴仁杓)는 기장의 대지주였으며, 1910년대 조선국권회복단, 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 등을 참가했고 고려상회와 동래은행 및 명정의숙을 지원한 인물이었다. 그의 동생 박공표(1904~?)는 기장 3·1만세운동을 주동하고 1928년 부산 청년회와 신간회 활동을 하였다, 그때 그를 체포해 고문한 경찰이 바로 노덕술이다.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였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선전부장을 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박공표의 장인이 바로 경성의전을 다닐 때 서울 3·1만세운동을 하였던 동산 김형기이다. 박인표의 아들 박영출(1908~1938)은 1925년 동래고보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그 후 일본 교토제국대학에 진학하고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4년의 형을 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박인표의 사위가 훗날 양산 3·1만세운동을 주동한 엄주태(1900~1928)이다. 김철수 자형인 박인표 집안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이었다.
 
▲ 김철수 인간관계도 김철수는 양산 출신으로 기장의 자형 박인표 등 혼맥과 지역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있었다.
ⓒ 이병길
 
김철수는 기장의 진명학교에서 2년을 다니다가 부모가 이주한 동래군 좌이면 구포리 28통 8호로 옮겨 구명학교를 2회로 졸업한다. 부산공립상업학교를 다닐 때 초량동 415번지에 거주하였다. 그가 다닐 때 한문교사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당시 한문교사가 김치련(金致鍊)이었다. 조선시대 역과 합격자의 명부(名簿)인 『역과방목(譯科榜目)』에 따르면, 자는 화중(和中)으로 우봉(牛峯) 김씨로 부친은 김재희(金載僖)이며 정유생(1837)이다. 1882년 고종 19년 시험에 합격하여 한학차상통사직장(漢學次上通事直長)이 되었다. 즉 통역관이 된 인물이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전후로 사비(私費) 및 대비(貸費)유학생이 증가하였다. 특히 동학교단은 일본에 체재 중이던 의암 손병희의 주도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또 동학교단의 민회조직인 진보회와 친일단체 일진회가 (합동)일진회로 합쳐진 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단지동맹'은 동학교단과 (합동)일진회가 파견했던 유학생 중 1907년 1월 당시까지 남아있던 32명 중 21명이 손가락을 잘라 혈서로 항의한 사건이다. 그들은 학자금이 끊겨서 생활비와 하숙비가 밀려 "비록 굶어 죽더라도 학업을 마치지 못하면 환국을 하지 않겠다"라고 하고 일제히 손가락을 깨물어 그 흐른 피로 혈서를 작성하였다. 동학교단의 7명과 (합동)일진회가 파견한 일본 유학생 14명이 참여하였는데 김치련은 (합동)일진회에서 파견한 유학생이었다. 그는 평북 용천 출신으로 당시 20세로 태극학회, 대한학회 회원, 대한흥학회 회원 및 간사원, 『상학계(商學界)』 편찬원 및 간사원·토론부장으로 유학생 단체활동을 하였다. 당시 일반적 반향은 주로 일진회가 친일행적의 전력이 빌미로 작용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07년 5월 부산에서는 동래부사 김교헌을 중심으로 「재일본단지유학생학자금모집취지서(在日本斷指留學生學資金募集趣旨書)」를 작성하여 김교헌 40환, 장우석과 윤상은 2환, 권순도 50전을 기부하는 등 총 318환 70전을 모았다. 전국에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한 이들을 장하게 여겨 국민들은 학비를 모아 보조금 수만원을 보냈었다. 당시 한국 유학생들은 '반일의식'높았던 편이었다. '단지동맹' 직후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단지동맹에 참여했던 전체 21명 중 10여 명이 이후 상급학교에 진학해 일부는 졸업하였다. 또 일부는 메이지(明治)대학, 와세다대학, 쥬오(中央)대학 등을 졸업했으며, 귀국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재직하였다.

김치련은 유학 후 함경남도 북청보성학교 교사로 있었다. 북청은 자녀교육에 대해 전국에서 가장 열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개화기 때 중학교와 보통학교가 80여 개가 있었다. 1945년 광복 직전까지 14개 읍면에 68개의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지역이었다. 그는 경성사립학교교원으로 있다가 1912년 8월 부산공립상업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의 역할은 일본어 교사들의 업무를 보조하기 위한 통역사 역할이었다. 그가 가르친 과목인 한문, 조선어는 일본어를 익히기 위한 보조적 과목이었으며 그는 일본어도 가르쳤다. 그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일본 유학시절의 활동을 보면 구국계몽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짧은 동안 근무하다가 1913년 4월에 사립동명학교에 전근을 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분명 그는 학생들에게 일본에 굴복하기보다는 조선의 얼을 가르쳤으리라 짐작된다.

김치련 후임으로 김장태(1886년생)가 왔다. 그는 욧가이치 현립상업학교에 근무하다가 1913년부터 부산공립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역시 한문과 조선어, 일본어를 담당하였다. 조선어와 일본어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2개 국어가 가능한 조선인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일본인 교사의 통역 역할을 하였다. 학교 교사 이후에 그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1917~19) 통역을 거쳐 1928년 경남은행 지배인이 되었으며, 1932년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하고, 부산주조소(釜山釀造所)와 부산진주조(釜山鎭酒造)를 경영하였다. 1940년대에는 부산부회 의원과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원(朝鮮臨戰報國團)으로 활동했다. 1941년 10월 22일에 결성하고 그 이튿날 아침 단장 최린 이하 약 백명이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참배하여 신전에 진충봉공(盡忠奉公)을 선서하였고, 이성환이 선서문을 낭독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등(吾等)은 임전체제 하에서 일체의 사심을 떠나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개개의 입장에 사로잡힘이 없이 2천 4백만 반도 민중은 진충봉공(盡忠奉公)할 것을 이에 선서함." 이런 전력으로보아 그가 학교 시절에 학생들에게 민족주의적 교육을 했을 가능성은 적다.

김철수는 1907년부터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발생한 국채를 한국인들이 갚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즉 왜 조선사람이 일본 국민이 되어야 하며, 저네들이 빌려 쓴 돈을 왜 우리 조선사람이 갚아줘야 하는지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학생토론대회 때 열변을 토했다.

"나라에서 발행한 국채는 어디까지나 국가에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국민에게 떠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지 않아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공부에만 열중해야 할 학생의 신분으로 이 운동에 앞장선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김철수의 이런 발언 이후 후쿠시 교장은 그를 반일 학생으로 지목하여 툭하면 교장실로 그를 불러 다정하게 대하며 회유하려 했다. 학교를 졸업하자 교장은 구포은행에 그를 취직시켜주었다. 당시는 은행이 최고의 취직자리였고 입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해서 힘을 기르는 일뿐이라 생각하고 은행 취업 대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어릴 때 겪은 일로 인해 그가 가졌던 "강자를 쳐부수고, 약자를 두둔하며 악을 배격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1, 2회 졸업생 중에 유일한 일본 유학생이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울산작가회의 울산민예총 감사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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