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 피디가 떠난지 1년.. 다시 진상조사보고서를 펼쳤다
[김유경 기자]
방송국 심장부인 주조정실에는 'MD(Master Director)'라고 불리는 방송운용책임자가 있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편성된 프로그램과 광고 등이 정해진 시간과 내용에 맞게 운행될 수 있도록 세팅하는 것이다.
여기 한 지역민영방송사가 있다. 이 방송사의 MD는 지난 2015년 초까지 정규직이었다. 그러다가 정규직 MD 2명이 병가를 사용하자 방송사에서 운전기사 업무를 수행하던 파견 노동자 2명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들 비정규직 2인은 파견 노동자로서 사용사업주인 방송국에서 MD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파견계약 시절과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이 방송사의 또 다른 비정규직MD는 방송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가 거부되자 소송을 제기했고 방송사는 이에 대한 방어책으로 형식뿐인 도급업체 현장 관리자를 두기 시작했다.
▲ 2020년 2월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언론노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회,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용균재단, 직장갑질119 등 55개 단체가 모여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출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 유성호 |
1년 전인 2020년 2월 4일, 같은 방송사에서 14년간 무늬만 프리랜서로 근무해오던 고 이재학PD가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죽음 이후 어렵게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고 국내에서 최초로 지역민영방송사 비정규직에 대한 전수 조사를 거쳐 2020년 6월 22일, 청주방송의 불안정 고용 실태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7개월,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원했던, 방송 비정규직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으며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노동환경은 어느 정도 현실화됐을까? 고인의 죽음 1주기가 다가오는 지금, 이 보고서를 다시 들춰본다.
위 청주방송 MD의 사례는 오늘날 방송업종에서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뒤틀린 지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하나의 단면일 뿐이다. 필자를 포함한 진상조사 위원들은 조사 과정에서 그동안 개별적 소송 사례들 속에서나 접했던 방송업종 비정규직의 실상을 종합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우선 청주방송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35%가 직접 고용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몸담은 업종도 매우 다양했다. 단순히 일부 직종에 국한되지 않고 MD, AD, 작가(TV/라디오), MC, CG, 리포터, DJ, 운전기사, 행정, 경비, 미화 등 광범위한 직종에 걸쳐있었다.
방송업은 대표적인 노동 집약형 업종이며 사용자들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시장 경쟁 속에서 '고용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비정규직의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그 결과 법리적 판단에 앞서 상식적으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왜곡된 고용 형태들이 난무한다.
진상조사보고서에 담긴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청주방송에는 20년 가까이 청주방송에 종속되어 청주방송의 업무만을 수행해온 프리랜서 작가가 있다. 그런데 이 작가에게 주어지는 보수는 프리랜서 등급표 상 5년 이상 근속자에 해당하는 금액이 최대치였다. 최초에는 청주방송 프리랜서 작가로 일을 시작했으나 통상의 작가 업무가 아니라 청주방송과 청주방송의 100% 자회사인 엔터컴을 오가며 각종 행사 및 보조금 사업에 대한 기획 업무 및 행정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대법원 판례의 노동자성 판단 기준에 비춰볼 때 청주방송에 사용 종속된 관계에서 노동력을 제공한 노동자임이 너무도 명백했던 AD들은 고인이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제기한 직후 회사가 처음 내민 VJ계약서를 체결했다. 거기에는 '본 계약은 업무 위임 계약이므로 청주방송에 대하여 고용관계를 주장할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입사 당시 파견업체가 올린 채용 공고상 행정사무 업무를 시작으로 방문객 접대, 시청자위원회 자료 정리, 회계 자료 입력 등의 업무까지 방대한 잡무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행정 파견 노동자의 임금은 항상 최저임금 수준이다.
위에서 언급한 MD의 경우 입사 과정부터 이후 사용자에 의해 파견업체에서 도급업체로 소속이 바뀌는 경위, MD 본연의 업무 외에 재난방송 모니터링, 블루레이 레코딩, 각종 행정업무 등을 떠맡게 된 과정들 하나하나가 현재 방송국에서 일하는 비정규직들의 기막힌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고 이재학PD처럼 청주방송에서 장기간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파견업체 소속으로 청주방송에 파견되어 일하다가 자회사인 '엔터컴'의 연봉계약직 등으로 입사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청주방송의 지휘 감독하에 청주방송의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다수였기에 불법파견의 징후가 명확했다.
무엇보다 보고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청주방송 비정규직의 현실은 규모와 무관하게 모든 방송사가 안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진상 조사 이후 청주방송의 비정규직 일부가 진상조사위의 권고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일부 노동조건의 개선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인의 안타까운 희생과 지난 1년 수많은 이들의 연대로 이제야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실마리는 진상조사보고서 속 비정규직들의 구체적 현실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지금 다시 진상조사보고서를 펼치는 이유다.
[CJB청주방송 故 이재학 PD 사망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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