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정치라는 회색 코뿔소

김현정 2021. 2. 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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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이 준 가장 큰 기회 중 하나는 위기 상황에서 주변 누군가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코로나19 지원 방안이 정치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이를 법제화 하기 위한 움직임과 여론이 정치성향과 진영의 이합집산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악플과 선플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의 인지도 끌어올리기에 코로나19 대책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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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경제부총리가 20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 참석,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세종=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코로나19 팬데믹이 준 가장 큰 기회 중 하나는 위기 상황에서 주변 누군가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벼랑 끝에서는 관계도 실력도 민낯이 드러나기 마련이며, 흔히 이를 ‘진가(眞價)’라고 말한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는 매일 정치와 행정의 진가를 확인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코로나19 지원 방안이 정치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이를 법제화 하기 위한 움직임과 여론이 정치성향과 진영의 이합집산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악플과 선플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의 인지도 끌어올리기에 코로나19 대책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 여당이 화끈하게 지르고, 또 화끈하게 취소하고, 관료들은 뒷수습을 맡는 행태가 반복되는 모양새다. 현장에서 취재를 해보면 국회의 목소리는 항상 과감하고, 혁신적이며, 협의나 결론에 앞서는 반면 관계 부처 관료들은 결론이 나기 전까진 머뭇거리고, 숨기며, 조심스러워 한다. 논의중인 대책과 관련된 각 언론의 보도 후에 코로나19 지원 예산을 담당하는 관련부처에서 ‘확정되지 않았으니 보도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해명 멘트를 기계처럼 반복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화려한 정치 언어를 행정이 가까스로 따라가는 모습이 꾸준히 연출되는데, 이는 곧잘 ‘기재부 패싱’으로 묘사된다. 역학관계와 책임의 문제를 따져보면 불가피한 수순이지만, 이렇게 한계를 맞닥뜨리는 관료의 입맛은 추측하건대 매우 쓸 것이다. 최근 기재부 사무관들이 잇달아 청와대와 국회를 향했다는 소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여당의 크고 강한 목소리가 항상 옳은 판단만 내놓을 수는 없다. 특히 오는 4월 보궐선거와 202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고차 방정식의 복잡한 계산이 깔린 과감한 언행이 더욱 잦아질 것이다. 뱉어진 정책을 당장 뒤쫓고, 훗날을 책임져야 하는 관료들은 그만큼 당황스럽고 지치는 날이 반복될 것이다. 국민적 피해를 재건하는데 써야 할 에너지는 중간 단계에서 이렇게 쉼없이 샐 것이다.

미셸 부커 세계정책연구소장은 2013년 다보스 포럼에서 ‘회색 코뿔소’라는 개념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전례가 없어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를 빗댄 ‘블랙스완’과 대비되는 것으로, 우리 앞의 보다 분명하고 예측 가능한 위기를 뜻한다. 돌이켜보건대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블랙스완이 아니라, 이미 존재감이 뚜렷했던 회색 코뿔소였다는 식이다.

개념의 원작자인 미셸 부커는 최근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특별 기고를 통해 코로나19를 명백한 회색코뿔소라고 규정했다.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에 대비해야 한다는 꾸준한 전문가 지적을 외면한 결과라는 것이다.

코로나19라는 위기와 포퓰리즘이 시너지를 일으키면, 그 이후에 두고두고 찾아올 위기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다. 정책은 가볍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썼다 지우는 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을 함께 말하는 지도자이며, K자 회복의 아랫다리를 들어올릴 수 있는 정교한 대책이다. 당정의 불협화음이 여권의 위력을 재확인하는 도구가 된다면, 정치 언어는 또 하나의 회색 코뿔소가 돼 위기를 키울 뿐이다. 부디 지금의 모습이 진가가 아니길 바란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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