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개봉한 아름답고 슬픈 잔혹 동화

김형욱 2021. 2. 2.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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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블라인드>

[김형욱 기자]

 
 영화 <블라인드> 포스터.
ⓒ (주)컨텐츠썬
 
설원 한가운데의 대저택, 눈먼 청년 루벤은 씻기 싫다며 울부짖고 날뛴다. 엄마가 보듬으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진정제를 맞고 겨우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뿐이다. 엄마는 루벤을 위해 책 읽어 주는 사람을 새로 고용한다. 다들 루벤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고 말았는데, 마리는 루벤을 완력과 카리스마로 가볍게 제압한다. 마리는 기가 막힌 목소리로 루벤에게 '눈의 여왕'을 읽어 주고, 루벤은 마리에게 반한다. 

마리는 어릴 때 당했던 학대의 흔적으로 얼굴을 포함한 온몸에 상처가 있는데, 화장도 하지 않고 거울도 못 보며 누가 자신을 건드리는 걸 두고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온몸을 꽁꽁 감춰 누구에게도 쉬이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루벤에게는 가감없이 보여 줄 수 있었다. 아니, 볼 수 없으니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감추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마리는 평생 받아 보지 못한 관심을 루벤에게서 받았다. 

루벤 또한 평생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마리에게서 받을 수 있었는데, 시각을 제외한 청각과 후각과 촉각이 예민해진 루벤으로선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좋은 향기를 풍기며 자신을 강하게 제압한 마리를 선망하게 된 것이다. 상처로 얼룩진 마리와 앞이 보이지 않는 루벤은 곧 사랑에 빠진다. 그런 그들 앞에 좋은 소식이자 나쁜 소식이 들려 온다. 루벤의 눈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루벤은 한없이 기뻐하는 반면 마리는 떠나고 만다. 루벤은 마리를 찾아 방황한다. 과연 이들에겐 어떤 앞날이 펼쳐질까?

'눈의 여왕'의 창의적 재해석

영화 <블라인드>는 네덜란드에서 자그마치 15년 여 전에 만들어져 실로 오랫동안 국내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2008년에 < KBS 프리미어 >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고, 2008년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 그리고 2021년 1월 드디어 국내에서 정식 개봉되어 보다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오래 전 만들어진 영화들이 '재개봉'되는 것과 다르게 이 작품은 '최초 개봉'이다.

보기만 해도 추위가 엄습할 것 같은 하얀 설원이 주 배경인 <블라인드>는 작품 속 책 읽어 주는 마리가 택한 안데르센의 동화 책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동화 속 카이와 게르다는 친구다. 어느날 트롤이 모든 것을 추하게만 보이게 만드는 거울을 깨뜨리고 그 파편이 카이의 눈과 심장에 박힌다. 이후 눈의 여왕이 카이를 데려가고 게르다는 카이를 찾아 나선다. 눈의 여왕이 사는 얼음 궁전에 도착한 게르다는 카이를 발견해 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의 눈물은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 파편을 녹였고 감정을 되찾은 카이가 눈물을 흘리자 눈에 박힌 거울 파편도 빠져 나온다. 둘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카이가 루벤이 아닐까 싶다. 운명인 듯 필연처럼 그를 찾아온 마리와의 사랑을 통해, 짐승처럼 울부짖고 날뛰기만 하던 루벤에게 다시 감정이 생기고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며 어떤 식으로든 아름다운 세상을 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후반부에서 떠나 버린 마리를 찾아 방황하는 루벤을 보면 반대인 것도 같다. <블라인드>는 '눈의 여왕'를 모티브 삼아 1대1 대응하듯 짜맞춘 게 아니라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

변화를 눈여겨 보자
 
 영화 <블라인드> 스틸컷
ⓒ (주)컨텐츠썬
 
영화의 주요 스토리 라인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변화'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관객은 앞을 보지 못하는 루벤의 입장에 서게 되기도 하는데, 우중충하고 흐릿했던 배경이 점점 색채를 띠며 화사하게 변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루벤과 마리의 감정이 긍정적으로 변한다. 

색이랄 게 없다시피 한 흰색 설원 바깥 배경에 우중충하고 흐릿한 저택 안쪽 배경은, 앞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마음도 황폐한 루벤과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마음을 닫아 버린 마리의 현재를 반영한다. 그런 둘이 만나 사랑하게 되며 배경은 점점 색채를 띠고 루벤의 머릿속 시각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아름다워진 것이다. 모두 사랑의 위대함, 위대한 사랑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마리의 변화 또한 아름답다. 절대 남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또 자신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가 루벤에게는 몸과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한편 '거울'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거울은 언제나 '추한 나'만 보여 줬기에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했던 물건이건만, 루벤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된 그녀는 치유되고 용기를 얻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비록, 물리적·정신적 상처를 가진 이와 앞이 보이지 않는 이의 불완전하고 불안한 사랑이지만 '사랑'은 사람을 치유하기에 충분하다. 

아름답고 슬픈 잔혹 동화

2008년 설원이 지배하는 북유럽 스웨덴에서 건너온 슬픈 잔혹 동화 <렛 미 인>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우리나라의 <늑대소년>이 생각나기도 한다. 로맨스 장르를 기반으로, 시간·공간적 배경을 정확히 하기 힘든 와중에, 아름다움과 슬픔과 잔혹이 공존하는 동화 말이다. 하나같이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영화들이기도 하다. 이성이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감성이 작품 전체를 감싸는데, 정해진 듯한 서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여 깔끔한 한편 분명 호불호가 갈릴 만한 지점도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조차 직진으로 돌파하려는 듯, 엄청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음악'을 투입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영화 음악가 '정키 XL'한테 음악을 맡겼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툼 레이더> <300> <왓치맨> <매드 맥스> <데드풀> <배트맨 대 슈퍼맨> 등의 대형 블록버스터를 맡아 온 유명인이다. 이 영화에선 영화의 분위기에 맞추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의 분위기를 이끄는 음악들을 선보였다. 때론 서정적으로, 때론 슬픔이 극대화 되게, 때론 환희에 차게, 때론 대범하기 그지없게, 때론 절망에 빠질 듯...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일 때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기다리고 꿈꾸고 추억한다. 영화가 해 줄 수 있는 많은 것 중에 하나가 우리에게 그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영화로 다시금 감정을 생생시키고 공유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블라인드>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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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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