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만원 롤렉스가 품절..공기만 남은 한국 매장 미스터리
‘롤렉스 매장에선 공기만 판다’.
요즘 스위스 명품시계 롤렉스를 매장에서 구입하기 어려워지면서 회자되는 말이다. 오전 11시 백화점 내 매장 문을 열기 전부터 수십 명씩 줄을 서는 건 예삿일이고, 애써 매장에 진입해도 인기 모델은 진열과 동시에 팔려 보이는 시계는 두세 점 뿐. 이 모든 일을 겪은 60대 박 모 씨는 “아들 결혼 예물용이라고 아무리 사정을 해봐도 택도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니들(자식)이 재주껏 구해보라고 돈으로 줬다”고 혀를 내둘렀다.
1일 업계에 따르면 롤렉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제품은 ‘데이트저스트’스틸 모델로 소매가 1600만 원 정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식 때 찼던 모델이다. 놀랍게도 같은 모델(흰색 다이얼)의 중고시세는 현재 소매가의 두 배가 넘는 3300만원까지 올라있다. 명품 시계업계 관계자는 “희소성 마케팅을 하려고 일부러 생산을 줄인 거 아니냐고 하는데 그런 거 없다”며 “1500만원이 넘는 인기 모델 A는 세계적으로 물량이 80만개 정도인데 적은 게 아니다. 그냥 사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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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명품 ‘나홀로 성장’
코로나19 창궐 1년, 명품 시장은 활황이다. 롯데백화점 인천터미널점의 경우 지난해 보테가베네타·발렌시아가·IWC·생로랑 등 15개 해외 명품 브랜드를 입점시켜 명품 매출이 무려 40% 증가했고, 그 덕에 백화점 전체 매출도 1.8% 증가로 마감했다. 현대백화점 판교점, 갤러리아 명품관,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및 강남점 등도 같은 이유로 매출이 전년 대비 5~9%씩 늘었다. 외출 자제 등의 여파로 지난해 백화점 업계 매출이 9.8% 역 신장한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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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명품 판매’ 1위로
그런데 세계 명품 시장은 코로나로 꽤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패션·잡화·보석 등 개인 명품 세계 시장 규모는 2170억 유로(약 294조원)로 전년(2810억 유로) 대비 23% 곤두박질쳤다. 조사를 시작한 1996년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코로나 충격파는 명품 시장의 판도도 바꿨다. 유럽과 미주를 제치고 처음으로 아시아가 선두에 오른 것이다.
지난해 명품 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국(본토)이 20%,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가 13%로 전체의 3분의1에 달했다. 반면 2019년 31%를 차지했던 유럽은 26%로, 미주지역도 30%에서 28%로 입지가 줄었다.
베인앤컴퍼니는 “일본은 소비가 줄었고 홍콩과 마카오는 가장 안 좋다. 반면 한국 소비자들은 명품 소비에 강한 욕구(strong appetite)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한국이 ‘아시아 명품굴기’를 이끈 셈이다.
명품 브랜드 기업의 중역인 B씨는 “지난해 한국에서 에르메스·샤넬 등 최상위권 브랜드들은 전년대비 30~40%, 그 아래 브랜드는 10~20% 정도 매출이 증가한 것으로 집계된다”며 “최상위권 브랜드의 경우 대기수요까지 포함하면 70~80%이상 늘어 명품 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확연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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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아파트 올라 “부자 된 기분”
국민 살림살이는 좋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7~9월) 동안 소비는 1년 전보다 3.3% 감소하고 대출은 52조6454억원으로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많았다. 그런데도 값비싼 명품 소비가 늘어난 배경은 뭘까.
경우선 맥킨지앤컴퍼니 부파트너는 “재미있는 사실은 주식 시장의 상승이 명품 소비 증가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이모(48)씨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코로나 직후 코스피가 폭락했을 때 지금 들어가면 무조건 승률 100%라고 해서 산 종목들이 두 배가 올라 1억원 넘게 벌었어요. 평생 이렇게 수익을 내보긴 처음이라, 집사람에게 명품백 선물하고 술도 많이 샀어요.”
실제 코스피 지수는 지난해 3월19일 1457.64포인트까지 폭락했다가 5월 2000포인트 고지를 되찾고 12월30일 2873.47포인트로 막을 내려 1년 동안 무려 32.1% 상승했다.
부동산 시장도 못지않다. 지난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로 6억원 대의 아파트를 장만한 직장인 허모(39)씨는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자축했다. 아파트는 1년 만에 매매가가 8억원으로 올랐다. 허 씨는 “월급을 쪼개 1억을 모으는데 5년 넘게 걸렸는데, 몇 달 만에 2억을 벌고 나니 소비에 자신감이 붙었다”며 “처음으로 명품지갑·벨트·서류가방 등을 샀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아파트 호가가 18억~19억까지 오른 주부 신모(34)씨도 “부자가 된 기분이다. 단지 내 어린이집에 가면 젊은 엄마들이 에르메스·샤넬백 하나씩은 들고 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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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고객 사정은 ‘제각각’
소득은 그대로지만 명품에 돈을 쓸 ‘상황’이 만들어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40대 직장인 박지은 씨의 경우 매년 두 번, 여름·겨울휴가에 총 1000만원 정도를 썼지만 지난해엔 국내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갔다. 박 씨는 “예전엔 같은 돈을 두고 여행이냐, 명품이냐 선택해야 했는데 이제 여행이 안 되니 명품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명품 보석 업계 관계자는 “부유층이 늘었다기보다 다른 활동 대신 명품에 돈을 쓴 사람이 많기 때문에 기업도 당장 섣불리 물량을 늘릴 수는 없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명품을 단순한 ‘소비’가 아닌 ‘투자’ 대상으로 보는 인식은 경제침체 속 명품 소비 증가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열쇠다. 처음부터 나중에 재판매(re-sell)할 것을 고려하고 기왕이면 제 값을 얻을 수 있는 ‘똘똘한 한 가지’를 사는 것이다.
김세완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의 명품 호황은 소득이 오르지 않아도 자산가치가 오르면 소비가 늘어나는 ‘부(富)의 효과’에, 화폐가치 하락을 대비하려는 ‘현물 투자 심리’가 결합된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미국에서도 1995~2005년까지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치솟자 소비가 소득을 앞지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는 “자산시장 호황은 지속될 수 없는 만큼, 부채가 많다면 자산가치를 소득으로 오해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소아·유지연·배정원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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