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부디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오"
문 대통령은 반대파도 섬기고
국민은 '너 속에 나' 지혜 얻길
올해도 우리는 어김없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그런데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맞이할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낡은 세상을 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싶다고 한다. 호기롭게 출발해도 이런 전면적 개혁은 어렵다. 사람과 제도 전부를, 그것도 일시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뜻밖의 결과가 생겨서 무섭기도 하다. 세상 바꾸기가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서 노자는 천하신기(天下神器)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세상 대신에 자기 자신을 바꾸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개개인의 생각과 몸이 부단히 달라지므로 고정된 나도, 진정한 이름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변화는 작고 굳어진 ‘나’를 보내고 크고 유연한 ‘나’를 맞이하는 것이다. 자기변화는 우회로로 보일지 모르지만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자기변화를 잘 보여주는 시 한편이 있다. 베트남 스님 틱낫한이 지은 “부디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오”라는 시다. 뒷부분만 적어본다.
나는 작은 배로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가 해적한테 겁탈당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열두 살 소녀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해적이다./ 볼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굳어진 가슴의 해적이다.// [. . . . . ]
부디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오./ 그러면 잠에서 깨어나
내 마음의 문을, 자비의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오.//
시인은 1978년 파리에서 베트남 평화대표단으로 활동하던 어느 날 끔찍한 뉴스를 들었다. 해적들이 보트에 올라 어린 소녀를 겁탈했고, 소녀는 스스로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뉴스였다. 40년이 흐른 뒤에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날 밤 슬픔, 자비심, 연민 때문에 잠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행자로서 분노와 무력감에 빠질 수 없어서, 걷기명상과 마음챙김 호흡을 하면서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틱낫한은 명상을 통해 태국의 가난한 소년과 하나가 되고, 그 소년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는 수백 명의 아이들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이들은 자라서 해적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자 분노는 사라지고, 마음은 자비와 용서의 에너지로 가득 찼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소녀만이 아니라 그 해적까지도 품에 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서 내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공(空)과 공존(interbeing)을 숙고한 열매입니다.” 그는 공과 공존의 명상으로 자비의 문을 열고 소년과 소녀를 모두 포옹할 수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최측근 인사들이 이 시를 읽으면 좋겠다. 대통령 취임사에 아름다운 약속이 나와서다.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이 말은 반대하는 국민도 ‘우리의 국민’으로 섬겨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약속, 자기변화와 자기확장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정녕 허공으로 사라졌는가?
반대파 국민들은 세상을 바꾸려고 광장으로 몰려갈 수 있다. 한국인의 몸에는 이제 자유와 민주를 억압하는 전제(專制)정치라면, 그것이 군부독재든 유사 일당독재든 참지 못하는 성향이 생긴 것 같다. 광화문 집회와 함성이 세상을 뒤집는 것도 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인내의 끝에 도달하면, 수십만 명이 광장으로 나가 문 대통령의 퇴진을 외칠지도 모른다. 피차 두려운 일이다.
나라는 이렇게 극단적인 분열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엄중한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우리는 문 대통령이 전지전능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지도자는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많이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았다. 부디 저 아름다운 약속을 소환해서 반대파도 섬겨라. 그들과 협치하여 공존·상생하는 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런 길이 보이자마자 국민들은 편안해지고, 대통령은 선한 힘이 생겨 권력 상실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
대통령이 국민 모두를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열렬지지자와 반대파는 서로에게 아픈 조롱과 혐오, 분노를 퍼붓는 대신, ‘너 속에 나’라는 공존과 사랑의 지혜를 터득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 그리고 한국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신문·방송과 소셜미디어, 직장과 가정에서도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수시로 만난다. 그 사람을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부디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오’라고 속삭여 보자. 이 시구를 부적으로 삼아 분열의 시대를 건너가자.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600만원 롤렉스가 품절…공기만 남은 한국 매장 미스터리
- '아장아장' 생방송 난입…기상캐스터 다리 매달린 아기 정체 [영상]
- [단독]산업부 이어 가스公도…그때 北원전 보고서 만들었다
- 자산 21억 가진 60대, 딸 주택자금 세금 안내고 대주는 방법
- 쇼트트랙 김동성 '배드파더스' 논란 해명…"애들한테 미안해"
- 갑자기 와르르 무너진 女탈의실…하늘서 남자가 떨어졌다
- 일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에…원정 근로 中동포 ‘승합차 참변’
- [글로벌 아이]CNN 베테랑 앵커가 28살 백악관 팀장에 던진 충고
- “3㎞ 이내 닭 모두 죽여라”…거센 반발 부른 ‘죽음의 목소리’
-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접종" 美플로리다 몰리는 백신 관광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