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지방시대] 시집 발간·영화 출연 이어 글꼴 제작까지 "와 이리 재밌노"
평생을 까막눈으로 지내다가 일흔이 넘어 한글을 깨우친 할머니들의 에너지는 대단했다. 문화 ‘수혜자’에서 ‘전파자’로 변신한 할머니들의 저력은 경북 칠곡군의 야심찬 프로젝트 ‘성인문해교실’에서 시작됐다.
칠곡군은 평생 교육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지역 학습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 평생 교육을 기반으로 한 칠곡군만의 특화된 인문학마을 공동체를 형성해 나눔과 배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해 온 성인문해교육은 한글교육을 받지 못한 어르신들의 고난한 삶의 눈이 돼 줬고 기역(ㄱ), 니은(ㄴ)에서부터 시작한 할머니들은 어느새 시인이 되고 연기자가 돼 지역의 문화를 꽃피워 가고 있다.
이곳에서 한글을 깨우친 할머니들의 첫 번째 작품은 바로 시집 발간이었다.
할머니들은 2015년 10월 1집 ‘시가 머고’라는 제하의 시집 발간으로 세상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강금연 할머니 등 89명의 할머니 시인들의 발랄하고 먹먹한 작품들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일약 이들은 스타로 등극했다.
할머니들은 이듬해인 2016년 10월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라는 제하의 두 번째 시집을 내고 왕성한 에너지를 과시했다. 2집에는 강봉수 할머니 등 119명의 작품이 게재돼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이어 2018년 11월엔 3집 ‘내 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가 출간됐다. 권연이 할머니 등 92명의 주옥 같은 작품이 실려 날이 갈수록 기교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집 발간에 이어 할머니들은 영화에도 데뷔했다.
2019년 2월 단유필름(김재환 감독)이 제작한 ‘칠곡가시나들’이라는 작품에 박금분 할머니 등 9명이 출연해 연기력을 과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2019년 3월 4일 서울 예술영화관 필름포럼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에 출연한 할머니들의 딸과 손주들, 영화감독 등과 간담회를 가지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칠곡 가시나들’은 인생 팔십 줄에 한글과 사랑에 빠진 칠곡군 약목면 복성2리 곽두조·김두선·박금분·박월선·강금연·이원순·안윤선 할머니의 이야기다. 2015년부터 칠곡늘배움학교(문해교실)에 다니며 한글을 깨쳐 가고, 시(詩) 쓰는 재미에도 흠뻑 빠져 시집을 출간한다. 그러면서 “고마 사는 기, 배우는 기 와 이리 재밌노”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난 양 즐거워한다.
영화를 연출한 김재환 감독은 “할머니들은 교복 입은 여학생만 봐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가시나’라는 이유로 학교에 갈 수도 없는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다. 이 분들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며 제작 동기를 설명했다.
칠곡군 약목면 두만천 일대에 시와 그림이 있는 ‘칠곡 가시나들 벽화 거리’도 조성됐다. 이 벽화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의 실제 주인공인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에 그림을 채웠다. 200여 미터, 7개 구간으로 나뉜 벽화에는 팔십이 넘어 한글을 배운 할머니들의 인생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할머니들의 세 번째 작품은 글꼴(폰트) 제작이었다.
칠곡군은 할머니들의 글씨체를 한글과 영문 폰트로 제작해 지난해 12월 16일 홈페이지를 통해 정식으로 배포했다. 지난 6월 폰트 제작을 위해 성인문해교육을 받고 있는 400여 명의 할머니 가운데 개성 있는 글씨체의 할머니 다섯 명을 선정했다.
폰트는 글씨체 원작자의 이름을 딴 칠곡할매 권안자체, 칠곡할매 이원순체, 칠곡할매 추유을체, 칠곡할매 김영분체, 칠곡할매 이종희체 등 5가지다.
폰트 제작에 참여한 이종휘(78) 할머니는“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우리 아들, 손주, 며느리가 내가 죽고 나면 내 글씨를 통해 나를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백선기(사진) 칠곡군수는 “칠곡 할머니들은 그동안 배우고 깨친 한글로 시집과 글꼴뿐만 아니라 할머니 연극단, 빨래터 합창단, 할머니 인형극단 등 마을 별로 특성을 살려 배우지 못한 설움을 떨쳐버리며 제2의 인생의 황금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칠곡군 평생 학습의 하나인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한글을 깨친 할머니의 이야기를 스토리 문화 관광 상품으로 육성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백 군수는 “지난 10년간 자치단체로는 최초로 인문학과 성인문해교육 등의 평생 학습을 행정에 접목시켜왔다”며 “이를 통해 군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이웃 간, 세대 간 소통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지역사회에 확산시켜왔다”고 자평했다. 이어 “평생학습은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넘어 영화, 시집, 칠곡 인문열차, 인문학 마을축제 등이 문화 관광 상품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칠곡군의 신 성장 동력이자 미래 먹거리 산업의 하나로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생의 굴곡에서 한 편의 시나 영화가 삶을 지탱하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평생학습의 바탕이 탄탄한 칠곡에서 인문학의 꽃이 활짝 피어 새로운 칠곡, 잘사는 칠곡의 바탕이 되는 인문학 도시로 만들어 전국에서 가장 주민이 행복한 도시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백 군수는 “칠곡만의 경쟁력과 스토리를 갖춘 인문학과 평생 학습을 칠곡의 대표 문화 관광 상품으로 육성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칠곡=김재산 기자 jskimkb@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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