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종 전 법원장 1심 무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인가
[한상희]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법 '안'에 있는 사람과 법 '밖'에 있는 사람도 과연 평등할까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는 법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헌법 위반 사태였습니다. 사법농단이 세상에 알려진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가지만, 법관탄핵과 법원개혁은 전혀 진척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사퇴임하는 판사들이 늘면서 탄핵대상자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에 깊이 관여한 전·현직 법관들의 형사재판은 장기화되면서, 기소된 지 2년이 다되도록 1심조차 완료되지 못했고, 그나마 선고된 사건조차 번번이 무죄판결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법관이 법관에 대해 내린 이 무죄판결은 과연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참여연대는 '광장에 나온 판결 - 사법농단 특집' 연재를 통해 법원 무죄판결 법리의 문제점을 짚어보려 합니다.
'공무상기밀누설죄 및 직권남용죄' 이태종 1심 무죄 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6형사부 2019고합190, 김래니(재판장) · 이진아 · 신철순 판사
사법농단사태 지우기
▲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20년 2월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피고인의 행위는 헌법에 위반된다. 그러나 처벌할 수 없다."
지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대법원장과 법관의 인사권을 장악한 법원행정처가 소위 "엘리트 법관"들의 출세욕을 미끼로 하여 사법권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게끔 사유화했던 바로 그 사법농단의 사태를 두고 법원은 이렇게 판단하였다.
이 사법농단 사태는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 간부들이 정치권력자와 재판결과를 거래하며, 이런저런 방법으로 다른 법관의 재판에 개입하는 한편, 일선 법원에 근무하던 소위 거점법관들을 정보원 삼아 재판이나 법관 동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던 행태들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민주사회에서는 있어서도 안 되며, 있을 수도 없는 작태로 사법의 독립,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과 법치주의의 대원칙 자체를 유린하고 부정한 사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에 대하여 법원은 '귀걸이', '코걸이'식으로 법리와 사실관계를 조작하면서 법의 공백상태를 만들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사법농단사태의 주범과 공범들에 대량의 면죄부를 안겨다 준다.
[합법적 불법을 향한 법기술들] 죄형법정주의라는 망령
'합법적 불법'이라는 말이 있다. 법률에는 합치되지만, 그 상위법인 헌법이나 사회의 기본질서에 위반되는 행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법농단사태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헌정질서를 유린한 것이자 동시에 사법의 독립을 규정하는 우리의 법률과 제도에도 위반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불법하고 부정의한 사법농단사태를 굳이 법률의 이름으로 그 합법성을 가공해 내는 법원들의 안간힘만 있을 뿐이다.
"법률이 없으면 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는 죄형법정주의라는 원칙은 그 치졸한 법기술이 기댈 수 있는 전형적인 언덕을 제공한다. 우리 형법은 멍청하게도 직권남용죄만 규정할 뿐 지위를 이용한 죄는 누락시키고 있다.
그래서 직권을 남용한 것만 아니면, 그 행위가 아무리 나빠도 처벌할 방법이 없다.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조차 그러하다. 그래서 하급자들을 맘대로 부려먹던 상급자들은 그냥 그 행위가 "직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주장하면 그대로 무죄가 된다.
이런 논리에 따라 법원행정처의 간부나 선배법관이 다른 (주로 후배인) 법관에게 그의 재판에 대한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너무도 잘못된 행위이지만, 직권 즉 그의 직무상의 권한을 남용한 것은 아니다.
그의 직무란 법원행정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거나 자기가 맡은 재판을 잘 처리하는 것일 뿐이라서, 다른 법관의 재판에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는 일은 직권을 넘어선 직권 밖의 행위일 수는 있어도 직무 그 자체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법원이 굳이 그렇게 해석하고 있거나 그렇게 해석하고자 한다.
이 바람에 사법농단의 주역들은 하나같이 법망을 빠져 나간다. 우리 형법에는 직무상의 권한이 아니라 직무상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만든 죄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인사권을 가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승진경쟁에 목을 매는 법관들을 이리저리 조종하더라도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이 없"는 것이다.
법률이 없으니 죄도 없다. 그래서 독립된 법관에 의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우리 헌법의 기본구조는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가 어렵사리 이루어놓았던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과는 일순간에 모래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합법적 불법을 향한 법기술들] 전관피고인을 위한 또 다른 전관예우
우리 법원에는 전관예우라는 못된 관행이 있다. 법관이었다가 옷 벗고 갓 개업한 변호사에게 법원이 일정기간 이런 저런 형태의 '편의'를 봐주는 불문률이 그것이다.
모든 법관은 한 솥밥 식구라는 의식에 의한 것이건, 자신의 퇴직 이후에 대한 보험이라는 감각에 입각한 것이든 혹은 모시던 부장님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는 개인적 서열의 잔재로 인한 것이든, 이 전관예우는 국민이 부여한 사법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유화함으로써 법과 정의를 훼손하는 폐악이다. 그런데 그 전관예우가 이 사법농단 재판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전관피고인에 대한 예우가 그것이다.
실제 근대적인 형사사법에서의 각종 재판절차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제반의 절차법규와 함께 혹은 그 이상으로 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가득하다. 어쩌면 형사소송법같은 기본적인 절차법은 이 두 가지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과장은 아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동안의 우리 법원이 지금까지 행하여 왔던 형사사법과정은 이런 교과서적인 규정을 자못 낯설게 대해 왔다. 피고인의 권리임에도 대충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증거법칙이나 절차법칙에 조금 어긋난다 하더라도 대충 양해하며 그럭 저럭 진행되어 온 것이 그동안의 형사재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사법농단사태의 재판에서만큼은 피고인의 인권보장이 초일류의 수준으로 고양된다. 사법농단 재판을 계속하여 추적하면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경향신문의 기사는 이를 제대로 고발한다.
검사가 모두진술을 하면서 동시에 입증계획제시나 증거제출 등을 한꺼번에 하던 관행을 유독 이 전관피고인의 재판에서만 형사소송법에 따라 검사의 모두진술 -피고인의 모두진술- 검사의 입증계획 제시 등의 순서로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증거조사 또한 부분적으로만 하던 관행을 깨고 검찰이 제출한 거의 모든 문건에 대해 법정에서 새롭게 검증하였다.
특히 USB에 담긴 문건(무려 1142개에 달한다)의 내용과 그것을 검사가 프린트하여 제출한 문건의 내용이 동일한지의 여부까지도 일일이 대조, 확인하도록 하였다.(경향신문 "사법농단 재판에서만 지켜지는 '원칙'" 2019. 6. 22) "법정에서 이렇게 많은 형사소송 관련 법들이 언급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는 경탄스런 발언은 이 전관피고인 예우의 양상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그리고 형사법규는 최대한 좁게 해석해야 한다라는 형사법의 대원칙들도 마찬가지다. 유독 이들에게만 그 의미 그대로, 그 취지에 맞게 이 원칙들이 적용된다. 재판과정에서 이들과 관련한 사실관계에만 그렇게도 많은 의심의 물음표가 따라 붙고, 그렇게도 쉽게 무시되던 증거법칙은 이들의 변론 앞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린다.
그뿐 아니다. 앞서 서술한 직권남용죄라는 형법규정의 의미는 물론, 공무상 기밀누설죄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와 같은 규정도 유독 이들의 범죄에 대해서만 가능한 최소한도의 수준으로 해석된다. 그러다 보니 이 재판은 일반적인 형사재판과는 전혀 다른 궤도를 달린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전대미문의 헌법유린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사법농단과 관련하여 지금가지 내려진 모든 판결은 무죄의 선고였다. 일반 형사재판의 무죄선고율 1%라는 사법연감의 통계가 무색한 형편이다.
▲ 법원 내부 비리에 대한 수사 확대를 저지하려 수사기밀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이태종 전 서울 서부지법원장이 2020년 9월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이 끝난 뒤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전관피고인에 대한 예우의 징후들은 이 글의 비평 대상이 되는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에 대한 무죄 판결(서울중앙지방법원 제26형사부, 2020. 9. 18. 선고 2019고합190 판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에서도 어김없이 재생산된다.
이 사건의 내용은 다른 사법농단사태에 비해 단순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체제 아래에서의 법원행정처는 권위주의체제에서의 정보경찰만큼이나 정보수집에 열심이었다. 전국의 법관과 그들이 담당하는 사건들에 관한 정보를 한 손에 장악함으로써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식의 권력구조를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원행정처는 각급 법원에 근무하던 기획법관이나 공보관인 법관들을 "거점법관"이라 부르며 정상적인 업무 외의 정보와 자료를 수집, 보고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일어났던 이런 행태를 대상으로 한다.
이 사건의 피고인은 법원의 사무에 관하여 포괄적인 지휘감독권을 가지고 그 정보보고체계의 한 켠을 담당하였던 이태종 법원장이다.
검찰의 공소요지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거점법관인 기획법관이 부정비리사건을 저지른 집행관사무소의 직원들에 대한 수사정보와 자료(주로 영장청구서 사본)를 수집하여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일에 당시 그 지방법원의 장이었던 피고인이 이 과정에 공범으로 가담하였다는 사실(공무상비밀누설죄)이다.
수사상의 비밀은 피의자의 증거인멸을 막는 등 수사의 효율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나 피고인은 기획법관이었던 나아무개 판사와 더불어 영장청구사실은 물론 그 사본까지 입수하여 법원행정처에 보고하고 피의자등이 검찰에서 한 진술내용을 확인하여 보고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기획법관과 영장전담법관 그리고 법원직원에게 수사진행상황과 수사확대가능성 등 수사내용을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함으로써 직권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사실(직권남용죄)이다.
특히 피고인은 검찰수사가 자기 법원에 소속된 집행관에게까지 확대되거나 다른 법원에 소속된 집행관 사무소로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사무국장, 총무과장, 형사과장, 감사계장, 대표집행관 등 자신의 지휘·감독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행관사무소에서 저질러진 비리에 대한 영장청구서 사본, 사건관련자들의 검찰진술내용 등을 신속히 입수·확인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었다.
법원의 판단: 공무상기밀누설죄 부분
하지만 이런 공소사실에 관한 법원의 판단은 편협하다. 기획법관이 법원행정처에 수사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법원행정처에 전달한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런 전달과정에 그 기밀누설자인 기획법관이 속한 지방법원의 법원장인 피고인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라는 점이다.
검찰은 이 피고인이 자신의 관리 하에 있는 기획법관과 공모하지 않으면 어찌 그런 수사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으며, 또 그 수집된 정보를 법원행정처에 알릴 수 있었을까라는 너무도 당연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당시 법원행정처가 주요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여 법원행정처에 보고할 것을 수 차례 지시·강조해 왔던 사실, 그리고 지난 2016년 9월 긴급 전국법원장회의에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법원행정처와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으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방안을 시달하였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이런 법원행정처의 방침에 따라 피고인이 자기 법원 소속의 총무과장에게 기획법관이 요청하는 자료가 있으면 협조해 주라고 지시한 사실도 공모의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이런 사실로부터 큰 간격을 둔다. 기획법관이 법원행정처에 수사정보 및 자료를 전달하는 과정에 피고인이 개입하거나 공모하였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그 취지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검찰이 피고인의 공모행위를 증명하기 위해 제출한 증거들을 "증거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해야 했다.
원래 검찰은 기획법관에서 법원행정처로 이어지는 보고체제만 수사하였다. 압수수색영장 역시 기획법관을 대상으로 발부되어 집행되었다. 피고인의 공모여부는 그 이후에 수사대상이 되었고, 검찰은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보아 기획법관을 기소하지 않았다.
법원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기획법관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획득한 증거는 피고인에 대해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불법한 보고를 받은 법원행정처는 있지만 보고를 한 혹은 보고를 하도록 한 사실은 전혀 처벌될 수 없게 되었다.
증거인정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이뿐 아니다. 기획법관은 분명 피고인인 법원장에게 그 정보와 자료를 법원행정처에 송부할 것을 알리고, 피고인은 그 익일에 인편으로 그 자료를 전달하라고 지시한 사실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법원행정처에서 당장 보내라고 하니 기획법관은 즉시 이메일을 보내면서 법원장님께는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법정진술의 내용은 누가 봐도 간단하다. 기획법관은 법원장의 명을 어겼다. 법원장 몰래 정보와 자료를 송부한 것이 아니라, 법원장이 지시한 날짜(익일에)와 방법(인편으로)을 임의로 바꾸어 하루 전에 이메일을 보냈고, 바로 그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런데도 법원은 이 간단한 진술을 법원장 몰래 법원행정처에 보고하니 그 사실을 감추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굳이 곡해한다.
사실 이 판결은 사실관계 인정에서부터 무리가 따른다. 수사기밀누설의 행동대원이었던 기획법관이 수월하게 정보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총무과장이나 감사계장 등의 다양한 법원직원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왜 그런 협조를 하게 되었는지 역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법원은 무작정 이들이 법원장과 관계 없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독자적으로 그 정보원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시 그 법원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던 집행관사무소의 부정비리사건에 대해 법원의 주요 간부들과 기획법관이 합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법원행정처와 수사기밀을 주고 받고 하는 그 시끌벅적한 일들을 오직 법원장인 피고인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2017년 대법관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이태종 법원장이 극도로 무능하여 소관 법원의 동태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직무유기범이었거나, 법원장이었던 전관피고인에 대해 무죄의 판결을 선사한 법관의 인식체계가 우리의 그것과 너무도 다른 것이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듯 하다.
법원의 판단: 직권남용죄 부분
피고인에 의율되었던 직권남용죄의 부분에 대한 법원의 판단 또한 앞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원래 직권남용죄란 직권을 남용한 지시가 있어야 하고, 또 그 지시에 따라 상대방이 의무 없는 일을 하여야 성립한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이미 이 사건 법원은 검찰의 수사에 관한 정보나 자료는 수사기밀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방식으로건 정보수집의 지시가 있었고, 또 그에 따른 정보수집 및 보고행위가 있었다면 영락없이 유죄가 된다.
그리고 사실조사의 결과 서울서부지방법원 소속 공무원들과 기획법관은 정보와 자료의 수집을 하였다는 사실과 또 그러한 정보자료를 법원행정처에 보고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피고인이 무죄가 되는 길은 단 한 가지다. "위법·부당한 지시를 하였다는 직권남용행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판단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 사건 판결은 사법농단사태의 주범들에 대한 여타의 판결과 결을 달리 한다. "직무상"의 지시냐 아니냐가 여타 사건의 쟁점이라면, 이 사건의 경우에는 "지시" 그 자체가 존재하였느냐의 문제에 집중한 것이다.
그래서 법원의 판단은 그 "지시"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정당한 업무수행에 관한 것임을 입증하는 서술로 가득하다. 우선 형사과장이 영장청구서 사본을 보고한 일에 대해서는 법원장은 "통상적인 업무로서 영장공람결재를 하고 있는" 만큼 지시가 있건 없건 일상적으로 그 사본을 보고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런 지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한 업무 수행에 관한 것"이라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 법원은 사무국장이나 총무과장 등에게 영장청구서 사본을 총무과에 제공하도록 지시하였는지의 여부라든지, 집행관사무소의 부정비리사건의 피의자들이 검찰에서 한 진술내용을 확인하고 보고하거나 기획법관에게 제공하도록 지시한 사실과 같은 일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무국장이나 총무과장이 피고인인 법원장으로부터 그러한 지시를 받은 적이 없으며 자발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였다고 진술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시한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그 공무원들의 행위가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더 살펴볼 필요조차도 없다고 단언한다.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이 부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소사실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라는 것이 이 부분의 결론인 것이다.
서부법원 이상없다?
그리고 이런 판단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일어났던 사법농단사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정리되어 버렸다. 집행관사무소에서 발생한 부정비리사건에 대해 누군가가 수사기밀을 캐내고 그 정보와 자료들을 또 누군가는 법원행정처에 부지런히 갖다날랐음은 법원에서도 인정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수인인 기획법관이나 형사과장, 총무과장, 사무국장 등은 기소 되지 않았기에 처벌받지 아니하고, 이들을 총괄하여 지휘하고 감독하는 법원장은 아무 것도 몰랐다는 핑계(그렇지만 전술하였듯이 2017년에는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하였다)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한마디로, 서부법원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Court)
양승태 전대법원장 체제에서 자행되었던 사법농단사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리의 현대사에 또 다른 과거사가 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헌법의 근간이 되는 법치주의의 핵심을 건드리며 그 올바른 실천을 가로막았다. 국민이 위임한 사법권력을 사적인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법과 정의를 유린한 사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 사태는 지난 정권이 자행한 국정농단의 연장선상에 자리한다. 그것은 남용의 수준을 넘어선 사법권 그 자체의 부정이며, 그동안 담론수준으로나마 존재해 왔던 "절차적 민주주의"와 그 토대로서의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우리의 헌정질서 그 자체를 부정한다.
현재의 우리의 관심이 사법부의 제도적 개량 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는 여기서 나온다. 사법농단사태에 대한 철저한 응징과 그 재발방지를 위한 법원개혁의 조치들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비리한 과거사를 청산하는 주역이어야 할 정치권의 무능 내지는 직무유기의 무책임함이다. 정치가 제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정치가 사법화되고 사법이 정치화되는 악순환만 가중되었고, 이 와중에 사법관의 지배는 점점 더 공고화되면서 우리가 어렵사리 이루어놓은 "입헌적 민주주의"조차도 위협한다.
이태종 전 법원장에 대한 무죄판결은 이런 정치의 직무유기에 편승하여 비집고 나오는 또 다른 반동이다. 형식은 법치주의를 말하고 절차적 공정성을 내세우지만 그 실질은 사법권을 침탈하였던 관료법관들의 전횡을 정당화한다. 사법의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사법의 위험을 자초한다.
어쩌면 이렇게 헌법을 위반한 법관들을 정치적 심판대가 아니라 또 다른 법관들이 주재하는 재판대에 세운 것 자체가 잘못일 듯도 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현대사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한 국면을 넘기며 작전본부에는 긴급 전신이 타전된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입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블로그와 인터넷언론 슬로우뉴스에 중복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