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스러운 사형집행.. '암행어사'의 왜곡이 안타깝다

김종성 2021. 2. 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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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김종성 기자]

상당수 사극에서는 조선왕조의 사법제도가 무도하고 야만스럽게 묘사된다. 지방관인 관찰사나 사또들이 백성을 임의로 사형시키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KBS2 사극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의 최근 방영분도 그랬다. 지난달 25일 방송된 제11회에서 주연 배우 김명수(성이겸)와 동명이인인 배우 김명수가 연기하는 전라도 관찰사 김명세한테서 그처럼 야만스런 사형선고가 나왔다.  
 
 지난 26일 방송된 <암행어사 : 조선비밀수사단>의 한 장면
ⓒ KBS2
 
관찰사 김명세는 어사단 일원인 홍다인(권나라 분)의 아버지가 역모죄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는 데 일조한 과거 이력이 있다. 홍다인이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내고자 전라감영에 잠입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김명세는 홍다인을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 그런 뒤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영의정 김병근(손병호 분)의 밀명을 받고 홍다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사형은 전라감영 뜰에서 집행됐다. 관찰사는 "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고, 아전은 "망나니를 대령하라!"고 외쳤다. 물론 이 집행은 성공하지 못했다. 어사 수행원인 박춘삼(이이경 분)이 망나니로 가장해 감영에 들어간 뒤 사형집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항상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왕조시대의 사형 집행에도 최소한의 규율이 당연히 부여됐다.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고려시대에도 그랬다.

강감찬 장군이 거란족 요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귀주대첩은 1018년 사건이다. 이때의 고려 임금은 제8대 주상인 현종이다. 이름이 왕순인 현종은 세 명의 왕을 배출했다. 장남 덕종은 제9대 주상이 되고, 차남 정종(靖宗)은 제10대가 되고, 삼남 문종은 제11대가 됐다.

현종의 삼남인 문종이 했던 중요 발언이 있었다. 사형제도에 관한 당시의 관념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사형을 거듭 요청하는 형부(刑部)를 상대로 문종은 이렇게 말했다. <고려사> 형법지 휼형(恤刑, 형의 공정 집행) 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인명은 매우 귀중하며,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과인은 사형수를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3심(원문은 三覆)을 거치며, 사실관계(원문은 情實)를 놓친 게 있지 않을까 더욱 염려한다. 만약 억울한 누명이 있어 소송을 제기하고자 해도 방도가 없어 원한을 숨기고 말을 삼켜야 한다면, 애통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심리할 때는 신중히 하라."

문종은 '사형범죄는 반드시 3심으로 처리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역사학에서는 사죄삼복법(死罪三覆法)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이 말이 나온 때가 음력으로 문종 원년 8월, 양력으로는 1047년 8월이나 9월이다. 문종이 3심제를 강조한 것은 그 이전에는 3심제가 정립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시기에 와서야 정착되기 시작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때가 귀주대첩으로부터 29년 뒤다. 이 시기에 3심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한 세대 전인 강감찬 시대에는 3심제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하지만 사죄삼복법이 모든 경우에 확실하게 관철된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는 않고 '많은 경우'에 적용됐다. 인식은 확산돼 있었지만, 제도적 여건이 충분히 성숙돼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3심제를 강조하는 목소리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한 장면.
ⓒ KBS2
 
그런 상태로 조선시대에 진입했고, 건국 초기의 어수선한 상황에 3심제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지 3년 뒤인 1401년의 일이다. 역모죄를 고변했다가 무고죄로 몰려 사형을 당한 변남용 부자에 대한 심문과 판결이 하루 만에 끝난 일을 비판하면서 나온 일이다.

음력으로 태종 1년 2월 10일자(양력 1401년 2월 22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예전에는 사형범죄에 대해 세 번도 심리하고 다섯 번도 심리했다'며 '변남용은 사형을 받을 만하지만 하루 만에 끝낸 것은 심하다'라고 주장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상소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잘못을 뉘우치며 적법절차 준수를 약속했다.

그 후로도 사죄삼복법은 계속 강조됐지만, 여전히 철저하게 관철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법률 실무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18세기 후반인 정조 임금 때였다. 정조시대의 판례들을 수록한 <국역 정조 심리록>에 부록으로 딸린 '해제'에서 박병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사죄삼복법에 따른 검험(시신 검시)과 심리가 궤도에 올라 예외 없이 철저히 행해진 것은 정조대(代)에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2007년에 <역사학 연구> 제29집에 실린 정순옥 전남대 연구원의 논문 '조선 전기 의금부 죄수의 삼복(三覆)과 의정부 상복(詳覆) 시행 논란'은 사형범죄에 관한 3심제를 이렇게 요약한다.

"범죄사실이 명백하고 범행 증거가 확보되었을 때 지방에서는 해당 지방 관찰사에게, 중앙에서는 한성부를 거쳐 형조에 보고한다. 형조는 관련 내용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후 적정 형량을 논의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최종 판결을 요청한다."

드라마 <암행어사>는 정조시대 이후인 19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tvN에서 방영 중인 <철인왕후>처럼 이 드라마도 세도정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세도정치 시대 이전에 이미 삼복법이 확립됐기 때문에, <암행어사> 속의 관헌들은 이 법에 익숙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임금은 물론이고 형조에도 보고하지 않은 채 함부로 사형선고를 내리며 "망나니를 대령하라!"고 외친다. 조선시대 사법제도와 너무나 동떨어진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국가기관이 재판도 거치지 않고 백성을 은밀히 살해하는 일은 옛날에도 많았다. 하지만, 재판을 거쳐 합법적으로 죽일 때는 법률 제도를 반드시 따라야 했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재판에 회부된 죄수에 대해 임의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즉결처분을 집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심제건 2심제건 3심제건, 왕조국가에서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은 임금에게 있었다. 하늘의 대리인으로 인식되는 신성한 군주만이 생명권을 박탈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관이 마음대로 사형을 선고하는 일은 더욱 더 있을 수 없었다.

고려왕조도 그랬지만 조선왕조도 사형선고에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가 삼복법에 더해 상복법까지 시행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위 논문 제목에 언급된 상복(詳覆)이 바로 그것이다.

상복은 임금의 판결이 적절한지에 관해 의정부 대신들의 의견을 묻는 제도였다. 의정부가 좋은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복사(詳覆司)라는 부서가 형조 안에 있었다. 세종 때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삼복법과 보조를 맞추며 사형제도의 공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세종 21년 5월 3일자(1439년 6월 14일자) <세종실록>은 "수도와 지방의 사형범죄와 관련해 형조 상복사가 상세히 심의해 보고하고 의정부가 논의한 뒤에 (임금에게) 아뢰고 삼복법을 시행하니, 정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소개한다. 사형범죄의 공정한 처결을 위해 삼복법과 상복제도를 상호 조화적으로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드라마의 등장인물이나 스토리는 작가의 상상력에 따라 구체적 역사와 다른 양상을 띨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 배경에서만큼은 당시의 문화나 제도를 가급적 충실히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를 충실히 묘사해야 시청자들이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왕조에도 문제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왕조를 실제 이하로 야만스럽게 묘사하는 것은 고증 작업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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