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길, 진짜배기는 여기 있습니다

서부원 2021. 2. 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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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산중 일기] 다산 정약용과 혜장 선사가 교류한 '통섭'의 길

[서부원 기자]

독일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이라는 게 있다. 하이델베르크 성 건너편 네카어 강을 따라 야트막한 산 중턱에 걸려 있는 길이다. 길 이름 앞에 '철학자'를 붙인 건 하이델베르크가 가장 오래된 대학 도시라는 걸 은연중에 보여주려는 것이다.

내로라는 대학 도시인 만큼 길 이름 하나에도 학구적 분위기를 담았다. 다양한 분야의 학문 중에도 이왕이면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철학이 제격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독일 철학을 세계적인 반열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칸트까지 동원됐다.

기실 '철학자의 길'이라는 표현은 사유를 넘어 생존을 위해 걷고 또 걸었던 그를 위한 헌사다. 그런데 그는 길이 놓인 하이델베르크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가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근처를 평생 벗어나지 않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철학자의 길'은 고증하기 힘든 내러티브의 영역이다. 기존의 공간에 대학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이미지를 활용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입힌 관광 상품일 뿐이다. 물론, 실제로 칸트가 걸었는지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곳을 걸으며 사유를 길어 올릴 수 있다면 족하다.

누군가 걷는다는 건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고 했다. 칸트뿐만 아니라 루소도, 니체도, 걷지 않으면 생각이 멈추게 된다고 했다. 길이야말로 철학의 원천이자 본향이라는 뜻이다. 빠른 것이 선이라는 속도 경쟁의 시대, 걷는다는 건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숲길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 멀지 않은 데다 경사도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 서부원
 
우리에게도 '철학자의 길'이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숲길이 그것이다. 아직 공식적인 길 이름은 없다. 행정구역명을 딴 '강진 둘레길'과 '남도 유배길'의 일부 구간으로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도중엔 '생태 문화 탐방로'라는 멋대가리 하나 없는 팻말도 걸려 있다.

'제주 올레길'이 주목을 받은 이후, 걷기 열풍이 불며 우후죽순 '길'이 생겨났다. 시군 단위의 지방정부마다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다. 구간별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안전시설도 충분하지만,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바란다고 모두 '제주 올레길'이 될 순 없다.

그러나 이곳은 그저 그런 '관광 상품'이 아닌, 고증이 된 어엿한 역사의 길이다. 왜 아직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길을 오간 주인공 이름을 따 '다산과 혜장 선사의 길'도 좋고, 유교와 불교가 교류한 흔적이니 '유불의 길'이나 '통섭의 길'도 괜찮겠다.

이 길을 통해 찻잎이 전해졌으니 '다도의 길'도 맞춤하다. 이 길을 오가며 다산의 학문이 꽃을 피웠으니 '다산학의 태 자리'라는 의미가 담겨도 좋을 성싶다. 뭐라고 명명하든, 이 길은 그 어떤 이름으로도 충분치 않은 문화사적 가치가 있다.
 
▲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이 유배 와 10년 동안 거처하며 목민심서 등을 저술했던 곳이다.
ⓒ 서부원
 
이 길로 인해 백련사와 산등성이 건너편 다산초당은 한 몸이 된다. 백련사를 찾은 이는 이 길을 통해 다산초당으로 넘어가고, 다산초당을 찾은 이는 자연스럽게 백련사로 건너온다. 거리가 채 1km가 안 돼 쉬엄쉬엄 걸어도 3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반이고 적당히 구불거려 걷는 데 힘들지도 심심하지도 않다. 나무로 만든 계단이 없었다 해도, 당시 다산과 혜장 선사가 오가는 데 불편하지 않았을 성싶다. 서너 살배기 아이도, 팔순의 어르신들도 걷기에 무리가 없다.

칸트는 걷는 도중 땀을 흘리면 사색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던가. 단 하루도 걷기를 거르지 않았다는 그에게도 어울릴 법한 길이다. 그의 고향과는 달리 산과 바다가 면해 있고, 울창한 숲과 푸른 하늘이 조화를 이룬 이곳에, 생뚱맞게 그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혜장 선사와 다산의 인연

이 길의 시작점은 백련사의 동백숲과 야생차밭이다. 덖고 말린 찻잎을 보자기에 싼 혜장 선사가 다산을 찾아 길을 나선다. 다산으로부터 주역을 한창 즐겁게 배우고 있으니, 찻잎은 실상 수업료다. 나이로도 혜장 선사는 다산에 견줘 열 살이나 어리다.

서른다섯 늦깎이 학생은 밤낮으로 스승을 찾아 이 길을 오갔다고 한다. 스승은 늦은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응원했다. 호롱불 아래에서 찻잔을 사이에 두고 열 살 터울의 유학자와 승려가 학문을 논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산등성이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만덕산의 품에 안긴 백련사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생김새가 마치 너른 꽃잎 가운데 꽃술 같다. 신록이 우거질 여름이면 잠시 그 속으로 숨었다가, 숲이 옷을 벗은 겨울이면 산의 주인인 양 보란 듯 얼굴을 내밀 것이다.
 
▲ '휴게소' 해월루의 낮달 지붕 위로 어렴풋이 낮달이 보인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강진만의 풍광이 아름답다.
ⓒ 서부원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하는 그곳에 휴게소처럼 해월루(海月樓)가 세워져 있다. 강진만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곳에 서서 바다 위 떠오르는 달을 보면 저절로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게 될 것 같다. 처음 누각의 이름을 지은 이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을까.

여기서부터 혜장 선사는 스승에게 질문할 거리를 메모하듯 머릿속에 떠올렸을 것이다. 완만한 내리막인 데다 밟는 촉감마저 푹신해 발걸음은 가볍고 머리마저 맑아진다. 스승이 기다리는 집의 지붕이 보일 듯 말 듯 한 굽잇길이 10분가량 '밀당'하듯 이어진다.

마흔다섯 다산에게 혜장 선사는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학문의 지평을 넓혀준 도반이자, 유배객인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고 공감해준 지음이었다. 유배가 풀려 고향인 두물머리에 돌아가서도 평생 이곳을 그토록 그리워한 것도 혜장 선사와의 인연 덕분이다.

다산이 혜장 선사를 추어올리며 쓴 시만도 여러 편이다. 그의 이른 죽음을 애통해하며 쓴 만시는 그에게 혜장 선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혜장 선사는 둘이 처음 만난 지 6년만인 1811년, 고작 나이 마흔에 숨을 거둔다. 일흔다섯을 산 다산에 겨우 절반을 넘긴 삶이다.

인기척에도 다산은 연지(蓮池)에서 노니는 잉어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곳에 머문 10년 동안 유배객의 설움과 외로움을 달래준 소중한 친구다. 고향에 돌아간 뒤에도 이따금 이곳 주민들에게 서신을 보내 안부를 물었을 만큼, 다산은 연지의 잉어를 아꼈다고 한다.
 
▲ 연지와 관어재 유배객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잉어가 연지에서 노닐고 있다. 다산초당에 관어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 서부원
 
정면에서 보면 다산초당이지만, 연지 쪽에는 관어재(觀魚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같은 건물에 이름이 두 개인 걸 보면, 다산과 함께 잉어도 이곳의 주인임을 알겠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들도 다산과 혜장 선사의 만남을 부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다산은 책을 꺼내고 혜장 선사는 찻물을 끓였다.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때면 스승은 고분고분해질 것을 주문하지만, 자존심이 센 제자에게 면박만 당하기 일쑤였다. 데면데면해진 스승은 차 대신 술을 권하는데, 혜장 선사는 넙죽 받아 마시며 끝장 토론을 벌였다.

둘의 만남은 백련사에서도 이어진다. 언제부턴가 다산초당에서는 술을, 백련사에서는 차를 가운데 두고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혜장 선사가 찻잎 보따리를 들고 넘던 곳이 어느새 다산이 술병을 들고 넘는 길이 되었다. 6년 동안 그들이 오간 '철학자의 길'이다.

10년 전쯤 아이들과 이곳을 답사했을 때 일이다. 으레 그렇듯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함께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주차장으로부터 거리를 모두 합해 2km 남짓인데, 다 큰 고등학생들에게 그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라 여겼다. 문제는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는 데 있었다.

백련사의 동백숲에 감동하고 다산의 유배 생활에 숙연하던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백련사에서의 일정이 남아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한 아이가 아이들의 볼멘소리를 순식간에 잠재웠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까 올 때 우리가 혜장 선사의 마음으로 걸었다면, 이제 돌아갈 때는 다산 정약용의 마음을 떠올리며 걷는 거야. 같은 길이라 해도, 올 때와 갈 때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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