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물상객주들, 언제까지 존속했을까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기자말>
[조종안 기자]
▲ 군산 부영 수산동빈어시장(현 째보선창) |
ⓒ 군산 부사 |
군산어업조합(군산수협 전신)은 1933년 11월 4일 출범한다. 임원은 초대 조합장 광부가팔(光富嘉八)을 비롯해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됐고, 직원은 조선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조합원도 조선인이 훨씬 많았다. 이듬해(1934) 6월에는 좌등(佐藤) 군산 부윤이 2대 조합장으로 취임한다. 이는 조합 운영권이 일본인들 손에 쥐어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군산 객주조합은 일제에 의해 '문옥조합(問屋組合)'으로 재조직된다. '문옥'은 도매업을 상징하는 일본어로 일제는 객주들 취급 품목에 따라 '곡물문옥조합'과 '해물문옥조합'으로 갈라놓는다. 이 모두가 객주 영업권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조선 객주들을 어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함이었다(관련 기사: 일제가 객주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이유).
객주 영업권, 어업조합 중매인에게 넘어가
어상중매조합(魚商仲買組合)도 조직된다. 임원은 조합장(이광옥)을 비롯해 부조합장(윤성일), 이사(이범재, 차재영), 재무(문수동), 상무(백락춘, 이 권), 간사(박홍규, 유인환, 차용직, 남영환), 조사부(김홍권, 구순조, 이영익) 등 조선인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은 군산어업조합 소속으로 객주들이 해오던 해산물 위탁, 판매를 업으로 하는 중간상인이었다.
▲ 문옥권(객주권) 존속운동 보도한 1933년 6월 22일 치 ‘동아일보’ 기사 |
ⓒ 조종안 |
"군산 해산물 문옥조합(海産物 問屋組合)에서는 지난 20일 조합장 차덕노(車德魯)씨 외 7명이 회합하야 전북도 당국에 문옥권(問屋權: 객주권)을 존속시켜달라고 진정하엿다 한다. 동조합은 40여명의 조합원과 이에 종속된 천여 명의 어민으로 군산 수산업계에 막대한 발전을 보이고 잇엇든 바 돌연 금년에 와서 부내 서빈정(西濱町)에 잇는 전북수산회사에서 이것까지 독점하려고 암중활약을 하야오는..(아래 줄임)"- 1933년 6월 22일 치 '동아일보'
신문은 "이 문제를 실현시키기 위하야 군산 부회(府會)에까지 상정되엇으나 조선인 부의원 제씨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3개월간 조사연구 후 다시 부회에서 결정하기로 보류되엇든 문제"라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객주 모씨는 "도 수산과장이 동정을 표하며 '문옥조합'만은 종래와 같이 독립시키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으나 그마저 희망 사항으로 그치고 만다.
해물문옥조합은 군산 동빈어시장(째보선창) 중심으로 활동하던 객주들이 해산물 위탁 판매권을 강제로 빼앗기고, 활동에 제약을 받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설립한 객주조합이었다. 이들은 자율성과 위탁판매 중개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는 등 꾸준히 활동을 펼쳤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1937년 6월에는 해산물 객주제(客主制) 폐지 결정이 전라북도 도령(道令)으로 고시되기에 이른다.
해산물 객주제 폐지 결정이 고시되고 몇 개월 지나자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문 광고에서조차 객주를 만날 수 없게 된 것. '각처에 어업조합이 생겨나고 어시장이 출연하여 객주업(위탁 판매)을 대행하기 때문에 객주들이 점차 쇠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위기 상황이 엿보인다.
▲ 군산어업조합 공판장 모습(1950년대) |
ⓒ 조종안 |
광복(1945) 후 군산어업조합 위판은 영세 어민들이 소량의 어획물을 조합 공판장을 이용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개별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적절한 어가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위판업도 일부 객주의 횡포와 상인들 농간으로 주인 의식을 잃은 채 거래되는 등 어업조합은 객주와 상인들에게 거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군산(群山) 어협은 어부들이 잡아 온 고기를 어판장에서 경매한 다음 고기값은 외상으로 한다. 어부들은 고기값의 절반 내외를 7일 내지 10일간이나 지불 기일을 늦춘 연수표를 받고 있다. 그러나 고기를 잡아온 고기를 판 어부들은 곧 출어준비, 품삯 지불, 연료 마련, 배 그물 등 장비 수선을 해야 되는데 이건 외상이 안 된다. 연수표도 끊을 수 없고, 따라서 어부들은 부득이 객주(客主)들이나 고리대금업자들이 치고 있는 그물에 걸리게 된다." - 1966년 6월 27일 치 '경향신문'
신문은 "어협의 연수표는 결과적으로 객주들이 어부들을 착취하는데 쓰이지고 있는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조합측이 당일 결재를 해줬거나, 당국이 영세 어민들에게 수산자금을 대출해줬으면 악덕 객주나 고리대금업자 횡포에 놀아나지 않았을 터. 당시 정부는 책임이 없었는지 의문이다. 아래는 임성식(83) 전 군산수협 조합장 경험담이다.
"내가 선주할 때는(1968년 이후) 아침에 군산 어판장에서 경매하면 오후에 현찰로 찾아 썼지, 연수표는 받지 않았어. 만약 중매인 입금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이튿날 하루 기다려달라고 해서 그 다음날 받기도 하고 그랬지... 일부는 수표나 어음으로 받아 사채업자에게 선이자 떼고 현금을 쓰기도 했겠지만, 나는 와리깡(어음 할인)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
그때(60~70년대)는 주로 조기, 갈치, 병치 등을 잡았는데, 출어할 때 소금을 싣고 나가 잡은 고기를 바로 염장해서 강경이나 논산에 가서 팔았지. 강경을 더 많이 들어갔어. 강경에는 객주가 여러 명 있었으니까 단골 객주를 찾아갔지. 그러면 그 사람이 수수료 얼마씩 먹고 현금으로 내주는데, 결재가 바로 안 되면 며칠 있다가 가서 받아오고 그랬지.
▲ 군산 하제포구 모습(1970년대) |
ⓒ 군산 수협 |
1960년대 후반 옥구군(군산시) 하제포구 주변에는 백합 양식장이 산재하였다. 1967년 수산청이 외화 획득을 위해 전국의 13개 지역에 굴, 백합 양식 주산지 조성 5개년 계획을 세웠을 때 옥구군도 포함될 정도였다. 1970년 초에는 노량조개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수출됨으로써 하제포구는 전북의 3대항으로 꼽히면서 어패류 집산지로 부각된다.
<군산시 수협 70년사>에 따르면 1970년 초 하제포구에서 양육 판매되는 수수료는 객주(客主)로부터 2~3%씩 받아오다가 위판시설 완비(1971) 후 조합에서 중매인을 지정한다. 이후 위판이 개시되자 객주들의 심한 반발로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조합의 꾸준한 설득과 이해로 위판업무가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고, 1977년에는 상호 금융도 겸하게 된다.
당시 하제포구는 옥구읍 선연리에 속해 있었으며 1971년 11월에야 어패류 취급하는 공동 창고가 준공되고 이때부터 위판 업무도 시작된다. 이후 객주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 같은 기록은 1970년대에도 위판 시설이 없는 포구에는 물상객주가 상주했었다는 임성식 전 조합장 경험담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군산디지털문화대전, 동아일보, 조선일보.
- 다음 기사 '장작 거리' 계속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