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장위동 짓누른 좌절감..안철수는 걷어낼 수 있을까
방범창 창살 속으로 잔뜩 구겨넣은 '뽁뽁이'
줄자로 재보니 폭 3m 18cm 불과한 '소방도로'
안철수, 장위동 주민의 꿈 되찾아줄 수 있을까
"재개발, 뭐 되지도 않는 것, 빨리빨리 혀!"
안철수 대표가 어떤 일로 장위동까지 왔나 궁금했던 노파는 "재개발 때문"이라는 말에 버럭 화를 내며 애꿎은 재개발추진위원장의 등짝을 연신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31일 6호선 상월곡역 2번 출구로 나왔다. 역세권이라 할만한 건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큰길에서 꺾어져 들어가니 화랑로 좁은 골목이었다. 보도인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차도였다.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오전 11시인데도 볕이 들지 않는 골목 곳곳에는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상공에는 서울에서는 드문 풍경이 된 전봇대와 전선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서울 성북구 장위동 일대는 2006년 뉴타운 사업 대상이 됐다. 15구역은 2010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돼 7월에 추진위가 설립됐으나, 이듬해 박원순 전 시장이 당선되며 암초를 만났다. 마침내 2018년 박 전 시장은 직권해제를 했다. 10여 년에 걸친 개발의 꿈이 물거품이 됐다.
15구역의 일부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서울시를 상대로 재개발구역 직권해제 무효확인소송을 냈다. 서울시는 주민들에게 거듭 패소하면서도 항소를 거쳐 상고까지 했다. 주민들이 끝내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게 된 것이 불과 지난 14일이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31일 바로 이 장위동 15구역을 찾았다. 박원순 전 시장에 맞서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 지종원 장위15구역 재개발조합설립추진위원장이 안 대표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 대표의 "얼마나 고생하셨느냐"는 인사에 지 위원장이 "힘들었다"고 내쉬는 한숨에서 그간의 노고가 읽혔다.
화랑로19가길로 들어서니 방범창 창살 속에 에어캡(뽁뽁이)을 잔뜩 구겨넣은 주택이 보였다. 지 위원장은 "겨울에 우풍이 심하면 연료를 떼도 뜨싯하지가 않아 이런 것으로 바람막이를 한다"며 "날아다니는 날짐승도 저녁에 해가 지면 둥지로 들어간다. 우리는 사람이고, 주거복지가 복지 중의 제일 상위의 복지인데 이 열악함은 무엇이냐"고 토로했다.
창살 사이로 에어캡을 어루만지던 안 대표는 "올 겨울이 특히 추웠는데…"라고 말을 끝맺지 못하며 "이렇게 재개발이 필요한 곳인데도 (박원순 전 시장이) 직권으로 해지시켰던 것은 말이 안된다"고 했다.
조금 더 걷다보니 자동차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분명 차도인데도 자동차 한 대가 주차돼 있자, 사람이 지나가기조차 비좁아졌다. 안철수 대표는 "소방차가 아니라 일반 자동차도 못 지나가겠다"며 "도로 폭이 3m는 되느냐. 어떻게들 빠져나가는 것이냐"고 아연실색했다.
지 위원장이 "준비를 했다"며 줄자를 꺼내들었다. 도로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안 대표와 지 위원장이 줄자를 잡아늘렸다. 도로 폭은 정확히 3m 18㎝였다. 안 대표는 "소방도로는 법적으로 6m여야 하는데…"라며 "절반 밖에는 안된다"고 혀를 찼다.
10여년 꿈은 환멸로…주민들 사이 깊은 좌절감
"재개발 때문에 왔다" 하자 "되지도 않는 것!"
어르신들 "나 죽기 전에 내가 들어가 살겠느냐"
安 "시장 되면 재개발 안되는 일 없도록" 약속
좁은 골목에서 줄자로 재고 그것을 사진기자와 영상기자가 촬영하는 등 부산을 떨며 휴일 오전의 정적을 깨자, 동네 주민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담벼락 위로 고개를 내밀거나 대문을 열고 나와보는 모습이었다.
임양순(74·여)씨가 뒷쪽에서 느릿하게 다가와 "안철수가 왜 오셨댜. 아니, 안철수 아저씨가 우리 동네에 왜 오셨댜"고 물었다. 안 대표가 웃으며 "재개발 때문에 왔다"고 하자, 임 씨는 대뜸 "재개발, 뭐 되지도 않는 것, 빨리빨리 혀!"라고 대뜸 곁에 섰던 지 위원장의 등짝을 내리쳤다.
"잘 살게 해줘야할 것 아냐. 누가 이런 집에 살고 싶어서 사느냐"던 임 씨는 기자와 만나 "집이 후지니까 챙피스러워, 첫째가"라며 "여기까지 (재개발이) 다 되도록 약속을 했었는데 다 없어진 거야 뭐야"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여 년의 뉴타운 여정은 박원순 전 시장이 2018년 끝내 직권해제를 단행하면서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보였다. 지난 14일 대법원 승소 판결이 나왔지만, 주민들 사이에서의 깊은 좌절감과 패배주의가 장위동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안철수 대표는 몰려나온 주민들과 사거리라 칭하기 민망한 골목에서 즉석 노상(路上) 간담회를 열었다. 한 주민은 "'이게 언제나 되겠느냐, 안된다' '나 죽기 전에 되겠느냐' 이런 말씀들을 한다"며 "어떻게든 재개발이 빨리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면 고맙겠다"고 호소했다.
다른 주민도 "'언제 재개발이 돼서 내가 들어가 살겠느냐'는 연세 드신 분들이 너무나 많다"며 "빨리 (재개발이) 추진돼서 이분들도 (번듯한 새 집에) 들어가 살 수 있는 기쁜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노상 간담회에서 주민들은 안철수 대표에게 공약을 꼭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한 주민은 "한 번 공약으로 정했으면 그대로 추진해줘야 주민이 믿고 따를텐데, 박원순 시장은 조례를 자꾸 바꾸니까 주민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왔다"며 "한 번 공약을 걸었으면 끝까지 개발이 되도록 좀 밀어달라"고 주문했다.
그외에 "잘 되게 좀 해달라" "서울시장 되시면 조금만 도움 주시면 잘될 수 있을 것 같다" "탄력을 받아서 우리가 계속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시장님이 되셔야 한다"는 말들에서는 장위동을 찾은 '대권주자'급 서울시장 후보 안 대표를 향한 일종의 절박감까지도 느껴졌다.
과연 안철수 대표는 장위동을 짓누르고 있는 좌절감과 패배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을까.
노상 간담회에서 주민들의 호소를 들은 안철수 대표는 "지난 번에 방문했던 사직지구는 대법원에서 주민들이 승소했는데도 서울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추진을 안했다"며 "(장위동 15구역 주민들은) 2주 전에 승소하셨는데 내가 시장이 되면 절대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안 대표는 "주민분들께서 (박원순 전 시장의 직권해제 결정을) 법원에 제소해 지난 14일, 2주 전에 승소 판결을 받아 다시 조합을 결성하려 한다고 말씀했다"며 "이미 부동산 정책 공약을 통해 밝혔듯 민관이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재개발·재건축을 수행해나가도록 하겠다"고 재차 확인했다.
데일리안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안철수, 금태섭 제안엔 '무관심'…국민의힘엔 "야권 합심" 강조
- 공무원 성범죄 '원스트라이크 아웃'…안철수, 여성 공약 발표
- 안철수는 '태극기' 오세훈은 '일베'?…민주당의 극우몰이
- [현장] "좋은 일 많이 하셨었는데"…'오세훈 향수' 일어날까
- [현장] '시한부' 몰린 자영업자…나경원, 연이틀 어려움 들어
- 한동훈 "민주당 '검수완박'에 이재명 위증교사 묻힐 수 있었다"
- 이재명 위기에도 '추동력' 잃었나…1심 선고 후인데 '장외집회' 시들?
- 내년에도 차질 없는 의료개혁...의정갈등 해소는 숙제 [尹정부 개혁 점검]
- 클리셰 뒤집고, 비주류 강조…서바이벌 예능들도 ‘생존 경쟁’ [D:방송 뷰]
- ‘이제영·서어진·이동은·김민선’ 정규투어 무관 한 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