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불신의 이유
새빨갛고 커다란 종이를 가슴에 매단 채였다. 인터뷰를 청하면 대꾸는커녕 경멸하는 눈길만 돌아왔다. 다른 절박한 시위 현장에서도 그 정도 적대감을 느낀 적은 드물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불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종일 따가운 시선을 맞으며 생각했다. 내가 공감 못한 어떤 경험이 이들을 이만큼 분노하게 했는지를. 그날 겪은 불편함도 이들이 일생 동안 느낀 것에 비하면 사소할 것이란 생각도 했다.
내 아이폰 사진첩 ‘취재용’ 폴더에는 2018년 8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 사진이 남아 있다. 그해 내내 불법 촬영 편파 수사를 규탄하며 이어진 ‘불편한 용기’ 시위다. 맑고 더운 토요일 낮, 빨강 하양 검정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이 마스크를 낀 채 끝이 보이지 않도록 광장을 따라 무리 지어 앉았다. 현장에 일찍 도착한 나는 안내를 받아 시위대 천막 안에 들어갔다가 다른 진행요원에게 쫓겨났다. 남성들은 바리케이드 안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저녁까지 바리케이드 바깥에서 쭈그린 채 현장을 스케치했다. 남성 기자들은 별도로 A4용지에 붉게 인쇄된 취재카드를 가슴 정면에 핀으로 꽂아야 했다.
같은 해 연말까지 미투운동 1주년 기념 기획 기사를 준비하고 집필하느라 반년 가까이를 보냈다. 마무리는 국내 여성주의운동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짚으며 맺기로 했다. 그래야 현실에 발 붙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개인적으로도 광화문에서 목격한 분노와 한국 여성운동이 어떤 지점에서 맞닿아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때 인터뷰에 응해준 이들 중 하나가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영순 대표였다. 엉성한 배경 지식과 어설픈 질문을 들고 온 기자에게 한 시간 가까이 응해준 그가 고마웠던 게 생각난다.
최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사건 피소 사실 유출을 다름 아닌 그가 저질렀다는 소식에 잠시 멍했다. 노트북에서 녹취록을 찾아 기억을 더듬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새 여성주의운동과 관련해 “주장을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첫 세대”라고 말했다. 학생운동에 기반한 자신의 세대는 자칫 다른 이들의 반감을 사서 성폭력 처벌, 호주제 폐지 등 여성 의제가 날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고 했다. 공격받는 건 괜찮지만 의제가 외면당하는 건 무서웠다고, 때문에 사회가 거부감 없이 의제를 받아들이도록 머리를 쥐어짰다고 했다. 새로운 세대의 여성운동을 대단하다 여기는 건 그래서라고도 했다.
녹취록을 뒤적이며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생각했다. 섣부르고 주제넘은 짐작이겠지만, 그때 그가 털어놓은 ‘두려움’이 실마리 아닐까 싶었다. 여성 의제에 여태 힘을 실어준 ‘같은 편’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가 그들의 미움과 외면을 받지는 않을지, 그 때문에 산적한 여성운동 의제를 더 펼치지 못하진 않을지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분명한 건 그가 결과적으로 스스로 걸어온 길에 반하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성 인권에 평생을 바친 그의 삶이, 빛나는 역사를 지닌 이전 세대 여성운동이 이번 일 하나로 폄하되는 건 지나친 불명예고 또 공평치 않다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도는 다를지언정 명망 높은 여성 인권 변호사였던 박 전 시장에게도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불편한 용기 시위대가 뿜어대는 불신은 비단 제도권 언론만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시민단체 등 제도권 여성운동과의 연대를 끝까지 거부했다. 취재를 하던 당시 이 지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들끓는 요구를 현실에 이뤄낼 최선의 수단은 그럴 힘과 의지가 있는 선한 이들과의 연대라고 믿어서였다. 그러나 검찰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애초 왜 그런 불신이 생겨났는지를 아프게 말해주고 있다. 최근 정의당에서 일어난 일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건 자체의 참담함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은 적어도 피해자를 같은 편의 이해관계로 파묻지 않았다. 김 대표와 여성운동가 출신 여당 의원도 이런 길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방법은 누구나 아는 대로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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