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동네 동작리'가 궁핍해진 사연 [동작민주올레 시즌2]
서울시 중구 다동은 예전에는 '다방골'으로 불리는 동네였다. 조선시대 이곳에 다도와 차례를 주관하던 다방(茶房)이 있던 데서 유래한 명칭인데, 장사하는 부자가 많이 사는 동네의 대명사가 됐다. 동작리도 한동안 '다방골'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한강에 다리가 놓이면서 다방골 동작리는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기자말>
[김학규 기자]
▲ 동재기나루터 표지석 지금의 서울현충원 아래는 조선시대부터 삼남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동작진(동재기나루터)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나루터표지석은 한강변에 있지 않고, 서울현충원 담벼락 아래에 있다. |
ⓒ 김학규 |
삼남지방과 서울을 잇던 동작나루(동재기나루)
"남문 밖 썩 나서고 칠패말패 돌모롱이 아야고개 얼른 넘어 밥전거리 동적강을 얼른 건너 칼판머리 승방뜰 남태령 얼른 넘어 탄탄대로 내려올 제 좌우산천 바라보니 만화방춘 더욱 좋다."(신학균본 <별춘향가>)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이도령이 호남 어사로 임명돼 한양을 출발해 동작나루를 거쳐 춘향을 찾아가는 <춘향전>의 한 장면이다. 동작을 동적(洞赤)이라고도 했으니 동작강도 동적강으로 등장한다. 동작나루 뒤편에 우뚝 서 있던 커다란 바위산 사이로 난 통로를 칼판머리라고 한 대목도 재밌다. 마치 죄수들에게 씌우는 나무로 만든 칼(枷)판의 머리 넣는 부분과 흡사하다고 봤던 모양이다.
이렇듯 삼남 지방과 서울을 잇던 주요 나루터였던 동작나루는 영조 이전에는 노량진의 관할 아래 있었다. 삼남 지방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음에도, 조선 전기에는 노량진에 비해 덜 활성화돼 있었다.
하지만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동작나루가 한양을 지킴에 있어 중요한 길목임을 인식하고 관리를 철저히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조정은 변장(邊將)을 파견해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때 뱃길이 험해 사고가 자주 난다는 이유로 나루터를 옮기는 문제까지 논의되기도 했으나 영조 22년(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영조 27년(1751년)에는 한강진과 노량진의 배 각 5척(총 10척)을 이관 받음으로써 중앙정부의 관리가 강화됐다.
조선후기 동작나루는 한강을 근거지로 부를 축적한 경강상인의 주 활동무대로 성장해 한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농산물이나 목재와 장작을 나르는 요지가 됐고, 시전 상인의 횡포에 맞서 난전과 결탁한 동작리 어상(漁商)이 마포에 정박하던 배를 동작진으로 옮기게 해 어물을 독점하기도 했다.
▲ 장시흥의 동작촌 정선의 제자 장시흥은 <동작촌>을 남겼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칼판머리'라는 표현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
ⓒ 고려대박물관 |
1908년 의병이 동작리에 나타난 이유는?
1908년 4월 경성헌병분대장 야쿠시가와(藥師川) 소좌는 과천군 헌병분견소장 사노(佐野) 조장의 보고에 근거해 한국주차군 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에게 급히 보고서를 올렸다.
'융희 이년(1908) 4월 4일 오전 3시에 과천군 상북면 동작리 포촌(浦村, 갯마을)에 약 삼십 명의 폭도가 와서 의병대장 명령을 같은 마을 곽춘서 집의 입구 우측 덧문에 붙이고 약 한 시간 후에 마을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후 '동네 사람의 신고가 있었고, 과천 헌병분견소장은 상등병 4명과 통역을 인솔하고 급히 가서 폭도가 달아났을 법한 반포리 방면 일대를 정찰했으나 단서를 잡지 못했다'고도 했다. 동네 사람의 신고 내용에 따르면 '폭도'는 총기를 휴대한 자가 4명이고, 기타 흉기를 휴대한 자는 없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폭도'는 마치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불렀듯이 일본의 시각에서만 폭도일 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1년 전 정미년에 다시 일어난 의병(義兵) 대오의 일부였다.
이날 의병 30명이 한밤중(새벽 3시)에 동작리에 나타난 이유는 우선 의병 토벌에 나서고 있던 일본의 헌병대를 혼란에 빠뜨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한강 일대에는 서쪽의 김포나 양천에는 의병이 출몰하고 있어 나루터를 통한 곡물 운반 등이 원활치 않았던 상황이었다. 반면, 동작나루와 노호(鷺湖)에서는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들은 동작진도 위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조장함으로써 일본군 헌병대의 발을 묶어놓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실제 계획과 무관하게 '대장 150인과 병사 2500인'이 나타나 '다음날 살인(殺人)하리라'는 엄포가 담긴 의병대장 명령을 일부러 공개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주차군 헌병대사령부는 내부 경무국(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동작리 일대에 대한 경계와 정찰을 위해 한동안 부대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동작리에 출몰한 의병의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작나루에 근거해 '다방골'로 불릴 정도로 비교적 부유한 동네였던 동작리는 1년 전인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65명이나 참여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만 아니라 애국심도 앞선 동네였다. 의병이 군자금을 마련하는 데 동작리만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동네도 드물었을 듯하다.
동작리 사람들이 의병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면, 의병이 필요로 하는 군자금을 내고도 일본 헌병대에는 일체 비밀에 부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이 출동한 것이 동네 사람의 신고에 따른 것이라지만, 출동해 어떠한 단서도 잡지 못한 이유 역시 의병이 달아날 충분한 시간을 준 이후에야 신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인도교가 놓인 이후 동작나루 뱃사공들은
그런데 동작나루를 끼고 상업과 나룻배 사업 등으로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던 동작리 사람들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1917년 한강인도교가 개설됐기 때문.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널 필요가 없게 되자 나루터에서 일하던 동작리 사람들 상당수가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다. 그중엔 어부로 전업하거나 배를 개조해 유람선을 모는 뱃사공으로 직업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 표류민 300명 구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한강의 역사에서 최고의 피해를 안겼다. 바로 그 을축년 대홍수 당시 동작리의 김학삼은 나눗배로 표류민 300명을 구출하였다. |
ⓒ 동아일보 |
그런데 당시 보도를 보면 동작리 사람들에게 맞는 '사리(작돌)채취'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사리채취는 한강변이나 바닥에 있는 작은 돌, 잔돌을 채취하는 일을 말한다. 이 사리가 당시 일제의 대대적인 철도 부설과 경성개발에 요긴하게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동작나루가 있던 동작리 100여 호 주민들이 바로 이 사리채취 일에 종사했고, 이때까지도 동작리 사람들의 삶은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자본의 위력 앞에 생존의 위기에 몰린 동작리 사람들
그런데 1929년 시흥군수를 지낸 일본인 신미수(神尾修)가 용산에 세운 조선사리주식회사는 사리채취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로써 동작리 사람들은 생존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조그만 거룻배 하나로 생활해나가던 동작리 사람들이 전문 사리채취선을 갖춘 자본과의 경쟁에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동작리 사람들의 피해 언론 보도 동작리 사람들은 사리 채쥐로 먹고 살고 있었는데, 대자본이 들어오면서 생존권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
ⓒ 동아일보 |
하지만 동작리에 남아 사리 채취 노동자로 사는 일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동작리에 있던 사리채취장을 운영하던 사리채취 청부업자가 동작리 주민을 쓰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와 작업하면서 동작리 주민들의 생계는 다시 위기에 몰리게 됐다. 이에 동작리 사람들은 길영식과 계성우를 대표로 정해 사리 채취 원청업체인 철도국에 직접 대책마련을 호소하는 진정을 넣는다.
큰일 났습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동리에서 밥술이나 먹는다는 이 사람부터 조석을 끓일 수 없는 형편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합니까. 조선작돌회사가 창립되기 전에는 요 넘어 검은돌(흑석리, 黑石里) 사람들이 우리 동리를 다방골이라 평하였는데, 1년이 못 지나서 도리어 검은돌이 다방골 같이 생각되고 보니 장차 살길이 아득할 뿐입니다.
일제강점기 경제환경의 변화에 맞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이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니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그냥 웃으며 들을 수 없는 어떤 절박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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