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람 이름 안 댄다고 입을 찢은 경찰

박만순 2021. 1. 30.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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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관산면 방촌리 위희량·이순남 부부의 죽음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기사수정: 1월 2일 오전 11시 35분]

1948년 7월의 어느날. 땅거미가 질 무렵 전남 장흥군 관산면 방촌리에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마을 입구 둥구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불청객을 보고 반쯤 일어나 아는 체를 했다. "강 순경 어쩐 일이오?" 나이는 자식 뻘이지만 노인들은 강 순경에게 하대를 하지 못했다. 노인들의 인사를 받은 강 순경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강 순경이 말없이 지나치자 위치량(가명)이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저런 싸가지 읎는 자식 같으니라구. 인사하면 어디가 덧나나" "쉿! 들리겄어" 노인들의 뒷담화는 둥구나무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을에서는 저녁 준비가 시작됐다. 낯선 이가 마을에 들어온 것을 안 개들이 "컹컹" 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들은 불청객이 강 순경임을 알고 나서는 이내 짖기를 멈췄다.

대검을 주렁주렁 달고 다닌 의용경찰

마을 노인부터 개까지 두려워하는 이 강 순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전남 장흥군 관산면 관산지서 강천수 순경은 관산면 농안리 출신으로 '빨갱이 때려잡는 사람'으로 이골이 났다. 아니 그가 잡으면 빨갱이가 됐다. 마을 조무래기들은 강 순경이 무섭기는 했지만 멀찌감치 떨어져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강 순경은 다른 경찰과 달랐다. 다른 경찰들은 경찰 제복에 소총을 걸치든지, 기껏해야 대검 하나를 요대(옷이 내려가지 않게 허리에 둘러매는 띠)에 찰 뿐이었다. 그런데 강 순경은 요대에 대검 4~5개를 찼다. 그러다 보니 걸을 때마다 '철컥철컥' 소리가 났다. 대검의 경쾌한 리듬도 신기했지만 조무래기들은 실물로 대검을 보니 마냥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천수 순경은 정식 경찰이 아니라 경찰을 보조하는 '의용경찰'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식 경찰보다 더 열심히(?) 활동했다. 그 결과 관산지서장으로부터는 인정을 받게 됐고, 면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우는 아이들에게 "강 순경 나타났다"고 하면 울음도 그칠 정도였다.

"위희량 나와!" "누구시오?"라며 문을 연 위희량은(1922년생) 상대방을 알아보고 얼굴부터 찡그렸다. 하지만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지서에 가자"는 강천수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일본에 유학을 하고 완도수산시험장에 주임으로 근무한 위희량은 관산지서에 연행되면서 '오늘이 내 제삿날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서 뒤편 목욕탕에는 온갖 고문 도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위 '목욕탕'은 지서 순경들이 사용하던 자그마한 목욕탕이었는데 그곳에서 좌익사범들을 고문했다.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에 이어 입을 찢기도
 
 위희량-이순남 부부(위북환 제공)
 
"네놈 패거리가 어디 있는지 말해!"라며 김철현(가명) 지서장은 으르딱딱 거렸다. 김지서장이 말하는 패거리는 지난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초대 국회의원선거 반대운동을 벌인 관산면 좌익세력을 일컫었다. 당시 좌익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라며 국회의원 선거를 반대했다. 

위희량의 동지들은 단독선거 반대 투쟁 후 경찰을 피해 방촌리 뒷산으로 몸을 피했다. 그들은 저녁 때마다 마을에 내려와 쌀과 반찬을 요구했다. 

위희량의 입에서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자 김 지서장은 강천수를 시켜 고문을 하게 했다. 목욕탕에 사다리를 세워놓고 거기에 위희량을 거꾸로 매달았다. 젖은 수건을 얼굴에 덮어씌운 다음 물을 얼굴에 부었다. 물은 수건을 통해 코와 입으로 흡수되었다. 이른바 '물고문'이었다. '윽윽' 대던 위희량은 정신줄을 놓았다. 축 늘어진 그의 배는 개구리 배처럼 볼록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강천수는 고춧가루 고문을 시작했다. 사다리에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가 잠긴 주전자 물을 코에 부었다. '켁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침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정신줄을 잃었다.

강천수의 고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희량이 연행된 지 3일째 되던 날, 강천수는 그가 똑바로 얘기하지 않는다며 입을 찢었다. 그리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위희량을 강천수는 지서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죽교(관산면 면소재지 소재) 아래로 끌고 갔다.

"마지막 기회다. 네 패거리 있는 곳을 대." 입술 주변이 온통 피칠갑이 된 위희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눈빛은 살아 있어 강천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윽고 "탕" 소리와 함께 위희량의 목이 꺾였다. "탕탕" 두 발의 총소리가 더 있었다. 확인 사살이었다. 1948년 7월 16일 전남 장흥군 관산면 죽교 아래에서 있었던 일이다.
 
 위희량이 학살당한 전남 장흥군 관산면 소재 죽교
ⓒ 박만순
 
한 사람 손에 죽은 부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51년 2월 1일. "아이고, 서방님 계시오?" "형수님 오셨구만요." "쩌기서 울 동서가 총맞아 부렀습니다. 얼릉 치료좀 해 주씨오." 48년에 죽은 위희량의 형수 김봉님이 헐레벌떡 위황량을 찾았다. 위희량의 집안 동생 위황량(1927년생)은 관산심상소학교를 나온 후 독학으로 약종상 시험에 합격해 1947년 관산면 소재지에 '신생약방'을 차렸다. 

장흥군 관산면 방촌리는 장흥위씨 집성촌이었다. 서기 638년 신라 선덕여왕의 초청으로 중국에서 온 '위경'이 장흥위씨의 시조다. 방촌리는 주민 모두가 같은 일가인 자자일촌(자작일촌의 전라도 방언)이었다. 김봉님이 위황량을 찾은 것은 면내 유일한 약종상이기도 했지만 같은 일가라 편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봉님은 고무신도 온데간데 없고 맨발이었다. 위황량도 앞서가는 김봉님 뒤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위황량도 조금 전 총소리를 들었지만 마을 누군가가 죽었을 거라는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위황량의 집에서 사건 현장까지는 50미터에 불과했다. 그들이 헐레벌떡 뛰어갔을 때는 이미 위희량의 처 이순남의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위황량이 이순남의 맥을 짚었으나 허사였다.
 
 위희량 부부 사건을 목격한 위황량. 신생약국은 위황량과 그의 아들이 74년째 운영하고 있는 약국이다.
ⓒ 박만순
 
이순남의 손윗동서 김봉님과 시아주버니 위옥량은 곡을 했다. 남편 위희량이 경찰에 학살된 지 2년 5개월만인 1951년 2월 1일 아내 이순남은 마을 한가운데서 죽임을 당했다. 위희량·이순남 부부를 죽인 이도 똑같은 인물이었다. 관산지서 의용경찰 강천수였다. 이순남의 가슴에서는 피가 '쿨럭쿨럭'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김봉님은 솜으로 손아랫동서 이순남의 가슴을 막았다.

그렇다면 강천수는 이순남을 왜 학살했을까? 이순남이 인공시절 자신의 집에 와서 처에게 "아무 죄도 없는 내 남편을 왜 죽였냐"며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이순남은 항의 과정에서 감정이 복받쳐 강천수 처의 뺨을 때렸다. 수복 후에 강천수 처는 위 사실을 남편에게 고자질했고, 이로 인해 이순남은 강천수에게 즉결 처형된 것이다.

이순남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강천수는 방촌리를 돌아다니며 "이순남을 숨겨주면 일가를 몰살하겠다"며 협박했다. 그래서 이순남은 무한정 타지를 떠돌 수밖에 없었다. 부역자 처벌이 잠잠해지자 마을로 돌아왔는데 그만 매복하던 강천수에게 연행된 것이다.

강천수는 이순남을 끌고 가면서 그녀의 양뺨을 때리고 발로 찼다. 그녀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자, 강천수는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알립니다>
앞서 기사에서 언급된 장흥군 관산면 농안리에서 발생한 손씨 일가 몰살 사건과 관련한, 손씨-김씨 집안 갈등은 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2009)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사실관계가 다르다는 지적이 있어 관련 부분을 삭제합니다. 아울러 부정확한 보도로 피해를 입으신 관계자분들께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헌병학교에서 퇴교당할 뻔
위북환(1943년생)은 위희량의 형인 위옥량의 아들이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위희량 이순남 부부가 모두 죽자 집안의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한 일가 어른들은 위북환을 죽은 위희량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게 했다. 위북환은 사정상 초등학교 졸업만 다녔고 성인이 되자 헌병에 지원했다. 경북 영천의 헌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위북환은 퇴교 위기에 직면했다. 신원조회에 걸린 것이다.
 
 헌병 시절의 위북환
ⓒ 박만순
 
그는 중대장에게 찾아갔다. "중대장님, 저는 국가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 헌병에 지원했는데요. 아버지(양부) 때문에 퇴교 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라고 하소연한 위북환은 헌병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대에 배치되어서도 2급 비밀 서류를 다룰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위북환은 군 제대 후 민중서관에 취직해 문선공으로 일을 했다. 그가 민중서관에 근무하던 시절 출판한 책들은 <이희승국어대사전>, <민족의 섬광>과 중고등학교 교재와 사전 등이었다. 그는 이후 공업신문사, 신생인쇄소 문선과장 등을 지냈고, 야채 장사, 청소년수련관·아파트 경비 일을 봤다. 그러다가 지난 2020년 6월 병마가 찾아왔다. 뇌경색이었다.

위북환은(서울 성동구 용답동) 2021년 현재 아내와 함께 답십리 감리교회 권사로 있다. 그는 양부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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