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증조부 마춘걸, 연해주의 잊혀진 독립군 대장

민병래 2021. 1. 3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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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3세 유스베틀레나의 진실 투쟁

[글쓴이: 민병래(작가)]

 
 유베스틀레나가 고려인 지원 시민운동단체 김진영 사무국장과 대화하는 모습.
ⓒ 민병래
러시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을지로5가 지하철 역을 향하던 유스베틀레나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는다'는 국가보훈처 광고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외할머니 마소피아가 "아버지는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대장이었어, 나중에 일본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선고를 받았지, 어머니는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우리 부모님이 참 고생이 많았어"하며 중얼거리듯 들려주던 얘기가 생각났다. 그때는 까마득한 옛 일이라 무심코 들었는데... 그녀는 서둘러 타슈켄트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따라 통화 연결이 잘 안 됐다.

유스베틀레나는 남양주 오남리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보훈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둘째 미야가 사과 켕크빵을 만들어 달라고 보챘지만 엉덩이를 두들겨 돌려세웠다. 얼핏 보니 가방은 내던지고, 바지는 훌렁, 컵은 여기저기 마굿간이었다.

남편이 올 시간인데 저녁 준비를 미루고 공고 내용을 더듬더듬 읽어보았다. "아래 목록에 있는 독립유공자들은 훈장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으니 후손되시는 분들은 가족관계 서류를 준비해 신청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검색창에 외증조할아버지 '마춘걸' 이름을 쳐보았다. 결과는 (0)이라는 표시. 혹시 철자를 틀리게 쳤나 몇 번이고 살펴보았지만 잘못은 없었다.

1984년생으로 타슈켄트 양기율시 출신인 그녀는 모스크바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2010년 취업비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대학교 때 살풀이춤과 부채춤을 배우면서 고국을 동경했다. 어학연수 중인 2011년 러시아 우스리스크에서 온 홍울렉을 만나 예상치 않게 일찍 결혼을 해 세 남매를 낳았다. 보훈처의 광고를 본 2017년 어느 봄날 이후, 그녀는 독립군대장 마춘걸의 자료를 찾고 그 행적을 복원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복원되는 마춘걸의 투쟁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의 마춘걸 개인문서에서 발굴한 사진
ⓒ 유스베틀레나
 
마춘걸은 1902년생으로 연해주 중부에 위치한 이만(伊曼, 현 지명 달네레첸스크) 한인학교의 교사였다. 1920년 9월 그는 어린 제자들과 함께 대한의용군에 들어가 소대장이 되어 항일투쟁에 나섰다.

일본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 미국 등 다른 열강과 함께 혁명정부 전복을 꾀하며 6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시베리아와 연해주 일대에 출병시켰다.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이 패퇴하면서 다른 열강들이 철군하자 일본도 마지못해 일부 병력을 본국과 만주로 물리고 나머지 병력은 1921년 7월 블라디보스톡의 위쪽에 있는 스파스크까지 철수시켰다. 일본은 신생 러시아연방의 원동(遠東)공화국에게 사할린 북부의 조차, 일본상인에 대한 특권 등을 요구하며 완전 철병을 미루는 한편 연해주 일대 우리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공격과 연해주의 재점령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1921년 12월 2일, 일본은 백군 2개 사단을 앞세우고 11개 사단을 동원, 하바로프스키 방면으로 병력을 전개했고 전선은 이만에서 형성되었다. 이를 저지하려던 대한의용군과 러시아연방 원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은 이만에서 비낀으로 작전상 후퇴했다. 이때 대한의용군의 한용운중대 50명은 고립된 상태에서 백군 1500명과 조우했다. 이들을 저지해야 퇴각한 본대 병력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병력도 30배 차이, 백군은 일본군 군사고문의 지휘 아래 기관총과 대포, 기마부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이날 백군 쪽에서 폭탄은 바람칼처럼 쉼없이 날아왔고 기관총탄도 끝없이 쏟아졌다. 마춘걸은 소대장으로서 "장님 총질 하지 말고 한 방에 한 놈씩"을 외치며 선두를 지켰다. 금세 대한의용군은 총알이 떨어졌고 착검할 칼도 없는 상태에서 백병전에 나서야 했다. 마춘걸은 백두산 포수였던 엄관호, 부등깃 같은 어린 제자들과 뛰쳐나갔다. 그는 백군의 장검을 낚아채 휘두르다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시체 더미 속에 묻혀 확인사살을 피한 그가 밤중에 깨어났을 때는 열여덟 군데나 찔리고 베인 상처가 있었다. 백군이 다른 전선으로 이동한 후에야 마춘걸은 다리를 끌면서 이만의 한인농가를 찾아가 응급치료를 받았다. 가까스로 살아난 그는 만류하는 동포들 손길을 뒤로 하고 대한의용군 본대를 찾아나섰다.

이날 한용운중대와 마춘걸 소대장이 벌인 이만 전투는 연해주 해방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투쟁이었다. 당시 인민혁명군 극동사령관 셰브세브는 "조선 빨치산의 영웅성, 용감성, 공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예찬했다. 이날 이후 백군은 한인부대가 두려워 언제나 피해다녔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비록 백군과 일본군에게 이만을 빼앗겼지만 한용운부대의 투쟁으로 대한의용군 본대와 인민혁명군이 하바로프스키 방면으로 안전하게 철수,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듬 해인 1922년 4월 6일 이만은 탈환되었다. 마춘걸은 적십자사에 의해 구조된 김치율, 김덕헌과 함께 "전 대원 50명 중 47명이 전사했다. 한용운 중대장과 윤상원, 한익현은 시체를 정리하던 백군에게 마지막 권총사격을 가해서 18명의 백군을 더 죽였고 백군은 전사자가 400명, 부상자도 200명에 달했다"고 상세보고를 했다. 이날의 전투에 대해 일본 정보당국이 1922년 작성한 문서를 보면, 당시 백군은 대한의용군대원들을 "총검으로 난자하고 개머리판 등으로 쳐서 죽이는 등 참학이 극에 달해 얼굴 형체가 없었다"고 기술했을 정도다.

마춘걸은 전투보고를 마치고 한인동포들이 눈을 덮어 대충 수습해 놓았던 한용운중대장과 대원들의 시신을 공원묘지에 옮겼다. 그의 나이 20살, 21살에 치른 항일투쟁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그는 다시 소총을 들쳐메고 대한의용군 대오로 들어가 연해주 눈밭을 향해 걸어나갔다.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인정된 외증조 할아버지

이렇게 증조할아버지의 공적을 조각조각 맞춰나간 유스베틀레나는 서투른 한글 실력 탓에 대한고려인협회와 고려인지원 시민운동단체 '너머'의 도움을 받아 2018년 7월 1차 자료를 보훈처에 제출했다. 아쉽게도 2018년 순국선열의 날 공적심사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보훈처는 <재소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김블라지미르 지음, 국학자료원 발간)'에 이름 가운데가 다른 '마충걸'이라는 인물이 있고 이만전투 이후 마춘걸의 행적이 불분명해 공적을 확정짓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유스베틀레나는 증조할아버지의 삶을 복원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 민병래
유스베틀레나는 낙심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료를 모아나갔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1957년 10월 7일 쁘리카르빠트스키(현재는 우크라이나령) 군법재판소에서 "마춘걸에 대한 명예회복증명서를 발급"한 사실이었다. 이 문서에는 "일본의 간첩"이라는 1938년 1월 13일자 사형 판결이 잘못되었고 마춘걸의 범죄행위는 없었다고 적시되었다.

이렇게 복권된 데는 부인 마신헌의 노력이 컸다. 그녀는 마춘걸과 함께 재판에 넘겨져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글라그에서 10년이나 벌목작업에 동원돼 생사기로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강제노동에서 풀려나자마자 변호사를 통해 마춘걸의 억울함을 소명했다. 그 결과 무죄 판결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간첩 행위는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당시 소련은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만주북부까지 진출해서 극동에 긴장이 고조되자, 일본군의 공작활동을 우려해 용모가 비슷한 한인들을 강제이주시키는 결정을 했다. 당연히 한인지도자들은 반발했고 마춘걸 또한 저항을 했기에 다른 지도자 수천 명과 함께 일본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판결 5일 만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 마춘걸의 명예회복증명서 쁘리카르빠트스키(현재는 우크라이나령) 군법재판소에서 발행한 문서, 이를 유스베틀레나가 찾아냈다
ⓒ 유베스틀레나 제공
유스베틀레나는 1957년 발급된 거의 60여년 전 서류의 존재를 알아냈고 집안 모두가 잊고 있었던 이 문서를 찾아내 보훈처에 제출했다.

한편 마춘걸의 이만전투 이후 행적도 복원되었다. 그는 1924년 레닌그라드사관학교 조선과에 입학했고 적기단 연대장으로 투쟁했으며 1937년 9월 28일까지 (모스크바에서 370Km 떨어진) 카스트롬 사격부대 부대장으로 복무했다. 또 '마충걸'이란 인물 은 '마춘걸'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런 노력 덕에 마침내 마춘걸은 2019년 삼일절 계기 공적심사에서 '애국장' 서훈을 받게 되었다. 2020년 10월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 마춘걸의 직계 3대손 마빅토로에게 그 훈장이 전수되었다.

마춘걸과 마신헌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유스베틀레나는 마춘걸의 서훈 이후, 후손인정을 보훈처에 요구했다. 후손으로 인정되면 다니엘, 미야, 미하엘 삼남매에게 독립운동가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은 물론 특별귀화도 가능해진다. 

유스베틀레나는 이제 마춘걸의 이야기를 쓰려 한다. 나름대로 마춘걸의 기록을 복원했지만 빈칸이 많다. 이제 그 틈을 메우고 자료 사이에 생명을 불어넣어 마춘걸의 약전을 서술하려 한다. 아울러 10년씩이나 노역형을 치르고 꿋꿋히 살아낸 증조할머니 마신헌, 그녀의 삶도 독립운동이었음을 밝히려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4월 우즈베키스탄을 국빈 방문 해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즈벡의 자랑스런 국민으로 자리 잡은 여러분이 너무나 대단하시고 고맙습니다. 해외에 계신 동포분들을 잘 모시겠습니다. 독립운동 후손들에 대해서는 나라가 예를 다해서 보훈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부디 이 말이 중앙아시아 초원에 덧없이 흩뿌려지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유스베틀레나나 경기도 안산의 고려인 마을에서 연해주 땅까지 그리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살아가는 고려인의 가슴에 영원한 믿음으로 남기를 기대해본다.  

유스베틀레나의 그외 사진들
 
 시베리아 노역형에 돌아온 마신헌(맨 왼쪽). 마신헌의 딸 마소피아와 마스파르타크.
ⓒ 유스베틀레나 제공
 
 마춘걸 대장의 후손 마빅토르가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 훈장을 전달받는 모습.
ⓒ 유스베틀레나 제공
 
 마춘걸 대장의 자랑스런 후예 유스베틀레나. 그녀는 마춘걸 대장의 약전을 쓰려고 한다.
ⓒ 민병래
  
못다 한 이야기
① 이만(伊曼)은 옛 이름으로 지금은 달네레첸스크라고 부른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로프스크방면으로 수백Km 위쪽에 있다.

② 원동공화국은 극동공화국 혹은 치타공화국이라고도 한다. 1910년 4월 6일 러시아소비에트 연방의 극동영토 자바이칼에서 연해주, 사할린에 걸쳐서 수립된 독립국가였다. 1922년 11월 15일 일본이 철병하고 백군이 패퇴하자 소비에트 연방에 합병되었다. - 위키백과 참조

③ 이만전투는 연해주 해방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투쟁이지만 그 전투는 개황만 역사자료에서 복원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근현대사 사학회가 엮은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2020년 도서출판 한울발간)와 『박환교수와 함께 걷다, 블라디보스톡』 (박환 저, 아라출판)을 토대로 전투상황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복원했다.

⓸ 당시 이만전투에서 백군의 기관총 제원은 연구서에 기술되어 있지 않다. 당시 러시아 적군과 백군이 주로 쓰던 기관총중의 하나가 맥심이어서 이렇게 표현했다.

⑤ 『박환교수와 함께 걷다, 블라디보스톡』 (박환 저, 아라출판)에서는 이만전투 당시 백군은 일본군이 겉으로만 백군으로 속인 일본군부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증언에서도 일본군이 백군내에서 섞여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확실한 것은 백군 내에 일본군 장교들이 군사고문으로 사실장 작전지도를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⑥ 이만 전투의 생존자 3명에 대해 『박환교수와 함께 걷다, 블라디보스톡』 에서는 마춘걸, 김주린, 김한현이라고 밝히는데 윤상원교수의 논문 <러시아 혁명기 원동해방전쟁과 한인부대의 활약>에서는 김치율, 김덕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윤상원교수의 기술대로 적었다.

⑦ 이만전투 이후 마춘걸이 레닌그라드 사관학교 조선과에 입학했다는 것은 전북대학교 윤상원교수의 증언이다. 최발렌틴의 책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한인의 항일 독립운동』 (2013년 도서출판 관악 발간)에는 1925년 연해주 주정부위원회에 의해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유학보내진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글에서는 윤상원 교수의 증언을 채택해서 서술했다.

⑧ 또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발렌틴이 쓴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한인의 항일 독립운동』 에 마춘걸의 사진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은 러시아 정치 사회 역사 문서보관국의 마춘걸 개인공문서를 근거로 기술되었는데 여기에는 마춘걸이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유학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⑨ 유스베틀레나의 후손 인정은 조금 어려운 문제가 있다. 마춘걸의 딸 마소피아는 1925년에 출생했는데 아무르주의 주도 아무르카야 호적등록과에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925년 1월 1일 ~ 1931년 12월 31일까지 전체 호적자료가 보전되어 있지 않았다. 다행히 1932년생인 마소피아의 동생 마스파르타크는 출생등록이 확인되었다.

이때부터 다시 유스베틀레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연해주와 아무르주를 오가며, 마소피아와 그의 남동생 마스파르타크는 남매이고 모두 마춘걸의 자손이라는 것을 입증해서 아무르주 블라고베쉔스키 법원에 제출했다. 그 결과 "마소피아가 마춘걸의 딸"이라는 가족관계인정 판결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마소피아는 늦게나마 마춘걸의 딸"이라는 호적증명을 하게 되었다.

유스베틀레나는 이 판결문을 보훈처에 제출하고 후손인정을 요구했다. 보훈처(공훈관리과)는 마소피아의 호적재등록과정에 대해 "부정할 순 없지만 마소피아와 마빅토르의 남매 관계 인정이 진술에만 의존해 이루어진 판결이기에 엄정한 확인과정이 필요하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타슈겐트 양기율시에 가서 면담조사 주변 정황조사를 통해 최종 판단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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