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도 벌써 혼쭐났다..선거때마다 동네북된 기재부 굴욕史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7일 “오늘 방안을 마련하고 내일 입법한 후 모레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세균 국무총리와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손실보상제에 대해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손실보상의 소급 지급은 없다”는 쪽으로 정리됐고, 여당은 4차 재난 지원금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홍 부총리는 깊은 내상을 입었다. 정 총리로부터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는 질타도 들었고,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가 혼쭐이 났다.
여당과 기재부의 기 싸움은 사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됐다. 표가 급한 여당 입장에선 민심을 움직일 '실탄'이 필요했고, 곳간을 지키는 기재부는 재정 건전성을 걱정했다.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야당이 여당을 견제한다지만, 선거를 앞두고는 여야가 따로 없다. 기재부는 여야가 함께 때리는 ‘동네북’이 되곤했다. 과연 홍남기의 소신은 계속될 수 있을까, 아니면 ‘홍두사미’로 끝날까. 역대 사례를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①이헌재 vs 정세균=문민정부 이래 기재부와 여당이 가장 세게 붙었을 때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초였다. 광역 지자체장 4명(부산ㆍ전남ㆍ제주ㆍ경남)을 뽑는 6ㆍ5 재ㆍ보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여당은 민생 추경 등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재정경제부(기재부 전신)는 ‘시장의 기본 원리’를 내세우며 난색을 보였다.
5월 10일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을 국회로 불러 당ㆍ정 조율을 시도했다. 이날 주요 대화는 이렇다. “재경부는 당의 입장을 반영해 개혁 의지가 퇴색되는 일이 없도록 해줬으면 한다”(정세균 정책위의장)→“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이헌재 장관)→“시장경제를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장실패에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정세균)→“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이헌재)
이날 이후 이 부총리는 여당의 압박에 시달렸다. 그래서 “마치 시속 30㎞의 강풍을 맞는 듯하다”(5월 30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감쌌지만, 재ㆍ보궐선거 직후엔 사임설까지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 부총리는 여당을 겨냥, “386세대가 정치적 암흑기에 저항운동을 하느라 경제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7월 14일), “시장경제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7월 19일)고 작심 발언을 했다.
이에 여당도 폭발했다. “우리도 남들 하는 만큼은 경제공부를 했다”(이인영 의원), “이 장관이 우리들의 진의를 모르는 것”(우상호 의원) 등 반발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이듬해 3월 이 장관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위장 전입 등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노 대통령은 그를 떠나보내며 “해일에 휩쓸려 가는 장수를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다가 놓쳐버린 것 같은 심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②이명박 정부의 복지 논란=이명박 정부 때도 여당(한나라당)이 기재부를 몰아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총 38개 선거구에서 치러진 2011년 4ㆍ27 재ㆍ보궐 선거를 앞두고 2010년 말 예산안을 처리할 때다. 당시 의석수 172석인 거여(巨與) 한나라당은 당 공약인 ‘친서민 정책’을 명분으로 새해 예산을 대폭 늘렸다. 예산안을 강행 처리(12월 8일)했지만 실상 복지 예산은 기재부에 의해 대거 삭감된 상태였다.
후폭풍이 일자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윤증현 기재부 장관을 여의도로 불러들였고, 면담 직후 기자들에게 “내가 오늘 질책을 좀 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비공개 면담에서 안 대표가 “우리가 바보인가. 너희들(기재부)만 똑똑하고 너희들만 나라 살림을 걱정한다는 것이냐”라고 했고, 윤 장관은 “정부도 재정원칙이 있다. 존중해 달라”고 맞섰다는 전언이 여러 보도로 이어졌다.
다만 이때의 갈등은 길게 가지 않았다. 예산안에 당 핵심 사업 예산이 누락된 데 대해 여당 내부에선 기재부 책임이 아닌 ‘지도부 책임론’이 불거져, 안 대표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윤 장관은 이듬해 5월 당시 최장수(842일) 기재부 장관 기록을 세우고나서 개각에 맞춰 물러났다.
③박근혜 정부의 양적 완화 논쟁=2016년 4ㆍ13 총선을 앞두곤 ‘한국판 양적 완화’ 논쟁이 크게 벌어졌다. 재정경제부 장관 출신인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그해 3월 29일 선대위 첫 회의에서 “3% 이상의 지속성장을 위해선 한국은행의 양적 완화 등 거시경제정책 운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 생긴 논쟁이다. 한은의 발권력을 활용, 시중 채권을 인수해 ‘돈맥현상’을 막겠다는 것으로, 새누리당 총선 공약 2호로 나왔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당장 반발했다. 그는 “강 위원장이 말한 한국판 양적 완화는 당론이나 선거공약이 아니라 개인 소신을 말한 것 같다”며 “선거 공약은 아니리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에 강 위원장은 “양적 완화에 대한 내용을 모르고 비판하고 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계속된 압박에 새누리당 출신인 유 부총리가 입장을 바꿨다. 일주일만에 “정부 재정 건전성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강 위원장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후 기재부는 발을 빼고 한은에 책임을 돌렸고, 반대 입장을 강하게 고수하던 한은은 결국 그해 6월 8일 “금융 안정을 위해 나선다”며 양적 완화에 나섰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여당 대책 발표→기재부 반발→여당 압박→기재부 수용’ 악순환에 대해 경제계에선 오래전부터 제도 정비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총선(19대)과 대선(18대)이 모두 있어 선심성 정책 남발 우려가 컸던 2012년,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선거와 재정관리'(2012)라는 보고서에서 “재정 당국은 선거 전 재정보고서를 발간하고 선거공약의 재정 추계 결과를 공표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9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런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학계에선 무분별한 선심 정책을 막기 위해 재정목표를 강제하는 ‘재정준칙’(fiscal rules) 도입을 꾸준히 제안했고, 국회에서 논의도 있었으나 늘 흐지부지됐다. 지난해 말 정부가 재정준칙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하긴 했다. 하지만 기재부가 당초 요구했던 것과 달리, 국가 채무 비율을 국내총생산(GDP)의 60%로 폭넓게 잡았고, 각종 예외 조항도 많은 데다 시행 시기는 5년 뒤인 2025년으로 미뤄 맹탕 대책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나 정당의 선심성 정책을 막으려면 재정준칙 도입이 필요한데, 번번이 막히거나 혹은 하겠다는 시늉만 하고 있다. 차제에 재정준칙 제도화를 시급히 이뤄야 하고, 후보자 개인으로서는 정책에 대한 추계비용을 법안에 의무로 포함하게끔 관련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정말 레임덕 방지용일까···"결정 못하는 대통령" 문 대통령의 변신
- 하루만 버티면 장관되는 나라…박범계는 야당 패싱 27호
- 도경완 아나운서, KBS 퇴사…"2월 1일 공식 면직"
- 英브렉시트 후폭풍…싸게 산 온라인 명품, 세금폭탄 주의보
- "한마디도 안하면 음식 공짜" 일본에서 확산하는 '묵식 식당'
- 밤이 무서운 배불뚝이 중년 남성, 노화 아닌 갱년기 질환
- 트럼프·김정은 만나기도 전인데…'북한 원전 문건' 미스터리
- "맨다리 샌들 인상적"···CCTV속 손님 조롱한 카페사장 사과
- "월가의 탐욕, 내 10대 앗아갔다" 게임스탑 뛰어든 美개미 울분
- “히말라야 등반처럼 힘든 금연” 60만원 돈 준다니 940명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