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로 나온 美극우·음모론 집단..음지로 돌아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큐어넌(QAnon) 등 극우 음모론 집단의 구심점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이들의 세계관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끝내 재선에 성공해 정부 내 사악한 ‘딥스테이트’(Deep-State·숨은 권력집단)를 소탕했어야 했지만 지난 20일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날까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온라인 음모론자로 시작해 제도권 정치에 입성하더니 지난 6일(현지시간) 초유의 연방의사당 폭동 사태를 주도하며 미국 사회를 뒤흔든 이들의 다음 행보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구세주 트럼프’라는 믿음이 붕괴되면서 음모론자들도 힘을 잃을 것이라는 관측과 현실 문제의 원인을 ‘비밀스러운 무언가’에서 찾으려는 큐어넌의 작동 방식이 지속되는 한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공존한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지난 20일. 큐어넌 맹신자들에 따르면 이날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일으켜 수도 워싱턴DC에 모인 수많은 정적들을 일거에 체포한 뒤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송하는 ‘폭풍의 날’이 됐어야 했다. 취임식은 미끼였고 바이든 등 민주당 소속 반역자들은 곧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트럼프는 기어코 재선에 성공했고 진정한 애국자들이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했다, 20일 ‘위대한 각성’과 함께 미국 정치와 사회적 어젠다는 획기적 변혁을 겪는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부 허무맹랑한 음모론이었다.
큐어넌 추종자들에게 트럼프는 비밀 관료집단인 딥스테이트로부터 미국을 구해낼 구세주였지만 그 믿음은 배신당했다. CNN방송은 수많은 큐어넌 신자들이 바이든 취임 후 극도의 분노와 환멸감을 표하며 자신들이 속았다고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는 큐어넌을 떠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큐어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로 꼽혔던 기업가 론 워킨스는 바이든 취임식 직후 큐어넌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새 대통령이 취임했고 시민들의 의무는 헌법 준수”라며 “이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큐어넌의 역사는 길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해인 2017년 10월 극우 성향 온라인 게시판 ‘포챈(4chan)’에 ‘Q’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가 등장해 미국 사회를 떠돌던 각종 음모론을 뒤섞어 떠벌리기 시작했다.
음모론의 핵심은 미국을 배후에서 조종·지배하는 세력 딥스테이트가 존재하며 이들은 소아성애자, 사탄 숭배자, 렙틸리언(파충류 인간) 등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 민주당 고위 인사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억만장자 투자가 조지 소로스 등 경제인이 여기에 속해 있으며 트럼프는 이들을 막기 위한 전쟁을 수행 중이다. 수천명의 지지자가 생기자 Q는 자신이 기밀정보 접근 권한을 지닌 백악관 고위 당국자라고 주장했다.
황당무계한 괴담이 온라인을 벗어나 현실로 침투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해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하원의원 선거는 음모론자들이 주류 정치권에 입성하는 발판이 됐다. 큐어넌 추종자이거나 이들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10명 넘게 출마했고 하원에선 실제 당선자도 나왔다. 로런 베버트(35)와 마조리 테일러 그린(47)이 공화당 소속으로 콜로라도주와 조지아주에서 당선됐다.
미 공영 NPR방송과 여론조사 업체 입소스가 지난달 21~22일 성인 11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9%는 딥스테이트의 존재를 사실로 믿는다고 했다. 아동 성매매를 하는 사탄 숭배 엘리트들이 미국 정치와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지 묻는 질문에도 17%가 “그렇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큐어넌을 지지층 결집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당초 트럼프의 동조가 없었다면 큐어넌이 이토록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게 미 언론들의 분석이다. 미디어 연구기관인 ‘미디어 매터스 포 아메리카’에 따르면 지난 8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이 폐쇄되기 전까지 트럼프는 총 168개의 큐어넌 관련 계정을 리트윗하거나 언급하면서 큐어넌의 메시지를 최소 315회 이상 증폭시켰다.
트럼프는 떠났고 큐어넌 추종자들은 흔들리고 있지만 이미 큐어넌 음모론은 전 세계로 번졌다. 독일 브라질 프랑스 영국 호주 일본 등 각국의 극우세력은 큐어넌 음모론을 토착화시켰다.
독일에서는 지난해 8월 큐어넌 음모론의 영향을 받은 현지 극우주의자들이 수도 베를린에서 마스크 반대 시위를 주도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 민주당이 만들어낸 가짜’라는 음모론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에서 의사당 폭동 사태가 벌어진 지난 6일 일본 도쿄에서는 1000여명의 시위대가 “미 대선이 조작됐다”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미 대선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규정하며 트럼프의 승리를 주장했다.
한국에서도 일부 우파 유튜버들이 큐어넌을 적극 소개하면서 보수 성향 시민들을 중심으로 큐어넌발 음모론이 번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큐어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캐나다 콘코디아대에서 큐어넌을 연구해온 마르크 안드레 아르젠티노는 “Q와 트럼프가 없어도 큐어넌 신자들이 음모론을 믿게 하는 심리적 기제는 사라지지 않는다”며 “그들은 자신의 음모론적 사고방식과 반민주적 이상을 배출하기 위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방향을 잃은 큐어넌 추종자들을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포섭하려 한다는 징후도 발견된다. 인종주의, 여성 혐오주의, 반유대주의 등의 새 정체성을 이식하고 소속감을 부여해 극단주의 세력의 일원으로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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