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포와 조조의 한판 대결..메뚜기 떼가 승부 갈랐다

2021. 1. 2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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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 14

견성을 취해 조조와 청주병을 산둥 벌판에서 집 잃은 무리로 만들려던 진궁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조조가 견성에 귀환하면서 복양의 여포, 견성의 조조, 진류의 장막 등 졸지에 연주 안에서 리틀 삼국지가 열렸다.

지도로 보면 장막, 장초 형제에 진궁이 가세한 장막의 세력이 제일 컸다. 형식상으로는 여포도 그의 휘하였다. 다만 장막에게는 믿을 만한 군대가 없었다고 보인다. 점령 지역과 병력이 많아도 지역 호족이 거느리는 향병은 민병대에 불과하다.

조조가 장막에게 킹메이커 역할을 강요했던 이유도 젊은 날의 의리를 믿은 것이 아니다. 자기 군대가 없는 장막에게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조조도 장막이 여포를 끌어들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강아지가 늑대를 고용하는 격이 아닌가?” 조조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겠지만, 일단 당장은 늑대에게 먼저 물릴 사람은 자신이었다.

▶조조 서둘러 귀환했지만

▷여포와 한판 승부에 KO

견성으로 돌아온 조조는 자기가 당한 것을 생각지도 않고 전략 애호가답게 객관적인 상황 분석을 한다.

“여포는 하루아침에 한 주를 얻었다. 하지만 나라면 동평을 근거지로 삼아 항부와 태산의 길을 끊고 요충지를 이용해 우리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는 복양에 주둔해서 관망만 하고 있다. 여포의 능력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어림도 없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 194년 여름)

조조는 여포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바로 군대를 이끌고 여포를 공격했다.

하지만 주력군은 당대 최강인 여포의 병주 기병이었다.

여포 휘하에는 소설에서는 평가 절하됐지만 야수 같은 장수가 많았다. 여포 돌격 기병은 조조의 청주병을 향해 돌진했다. 조조 최정예라는 청주병은 단숨에 붕괴됐다. 청주병이 도망치자 다른 부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장막이 끌어들인 자는 늑대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여포군도 전부가 병주 기병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의 교리대로 기병이 치고, 보병이 따라 움직였다. 여포군의 보병들은 불을 지르며 조조군을 압박했다. 초원에 불을 지르면 화염 덩어리가 되는 숲과 달리 불길이 띠처럼 벽을 이루며 번져나간다. 불벽 앞에 내몰린 조조군은 기병에게 사냥당하고 대혼란에 빠졌다. 궁지에 몰린 조조는 불의 벽을 강행 통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을 달려 불길을 빠져나오다 낙마해서 왼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조조 내 하급 군관이 조조를 부축해 말에 태우고 빠져나왔다. 본진에 집결한 조조 장수들은 한동안 조조가 보이지 않아 당황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KO가 돼야 하는데 조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픈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새로운 공격 작전을 지시했다.

▶100일간의 대치

▷결국 양 군대는 철수

기록이 짧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조조는 갑자기 공성구를 만들게 한 뒤 공성전으로 전환했다.

사방이 적으로 휩싸인 조조는 아마 연주를 빨리 되찾고 싶은 심정에 여포의 정예군을 상대로 속전속결을 시도했던 것 같다. 청주병 이하 서주를 휩쓸었던 자신의 기병들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여포는 여포였다. 조조는 성을 포위했지만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여포의 기병도 지난번 전투처럼 쉽게 몰아붙이기 힘들었다. 조조가 방어 태세를 굳혔기 때문이다. 결국 양군의 대치는 100일이나 계속됐다. 이때 메뚜기 떼가 발생해 초원을 초토화했다. 곡식 가격은 급등했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엄청난 기근이 닥쳤다.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조와 여포는 철수했다.

휴전기를 맞아 여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견성 서북에 위치한 복양에 주둔하지 않고 조조의 근거지를 지나쳐 동남 방향 서주 쪽으로 진행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군량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는 혼란기에 반드시 방랑하는 군대가 생긴다. 백성 입장에서 보면 군도이고, 어떤 저술가는 군사 모험가라고 한다. 중국 땅이 넓다 보니 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적절한 지역을 잡아 터전을 만들거나 역전을 노리고는 했다. 당나라를 망하게 한 황소의 난, 이자성의 난, 근대에는 태평천국에서 군벌 전쟁까지 이런 방랑 전술은 항상 발생했다.

여포 역시 지원이 끊기고 부대가 줄어드니 힘을 쓰지 못했다. 승지현에 도착하자 현지 호족인 이진이 공격해 굶주린 여포 군을 몰아냈다. 여포는 할 수 없이 더 깊숙이 전진해 산양에 주둔했다. 이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승지쯤에 포진했으면 조조를 중앙에 둔 완전한 삼각 포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남쪽으로 더 내려가 산양에 포진하는 바람에 정예병 1만명 정도만 남기고 현지에서 모집한 군대까지 해산한 조조가 숨을 돌릴 여유를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조조는 황무지에 고립된 상태였다. 강 건너 복양은 비었지만 가서 점령해봤자 메뚜기가 뜯어 먹은 주검에 불과했다.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외부에서 양식을 수입하는 것뿐. 하지만 남쪽은 원술이고 서쪽은 장막, 동쪽은 그를 원수같이 여기는 서주이며, 여포까지 그쪽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동남 깊숙이 내려가는 바람에 동북쪽 산둥으로 연결하는 통로가 간신히 개방됐다.

이때 산둥 사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조조의 궁지를 본 원소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가족을 인질로 보내는 대신 분명 군량 지원을 약속했을 것이다. 고립무원에 굶주린 자에게 군사와 식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조가 승낙하려고 하자 사신으로 파견했던 정욱이 허둥지둥 돌아와 조조를 붙들었다.

삼국지 정욱전에는 정욱의 발언이 길게 소개돼 있다.

“원소는 역량이 안 되는 인물이라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능력자는 당신이다. 지금은 위기지만 나와 순욱이 도우면 대업을 이룰 수 있다.”

여러 듣기 좋은 소리로 채워져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핵심은 이 내용이다.

“제가 보기에 장군께서 이 상황이 되니 두려움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강한 척하더니 진궁, 여포, 메뚜기에게 삼연타를 맞더니 이제 겁이 나서 판단이 흐려졌다는 의미였다.

참모에는 두 종류가 있다.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과 개인의 심성과 상태를 지적해주는 사람이다. 정욱의 지적은 후자에 속한다. 삼국지 내내 등장하는 교훈이 있다. 참모는 주군을 잘 골라야 한다. 그릇이 되는 주군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인재든 완성형 인간은 없다. 모두가 성장형이다. 후자의 지적은 성장형 인간에게만 유용하다. 정체된 사람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가는 목이 달아나기 일쑤다.

조언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제대로 받아들이는 리더는 드물다. 조조는 극악한 위기 상황에서 원소의 제안을 거절했다.

정확히 이 무렵 서주의 도겸이 사망하고, 유비가 서주를 인수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4호 (2021.01.27~2021.02.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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