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경의 '시코쿠 순례'] (3) '보시'의 참뜻은..순례자에게 친절 베푸는 것=공덕 쌓기

입력 2021. 1. 29. 22:00 수정 2021. 5. 1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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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중 험하고 경사가 심해서 “순례자 자빠진다!”고 외치는 길을 ‘헨로고로가시’라고 한다.

시코쿠 헨로미치에는 헨로고로가시가 8개쯤 있다. 그중 12번 쇼산지 가는 길은 첫 번째 헨로고로가시로 알려져 있다. 도쿠시마역에서 요리이나카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해 다시 쇼산지행 버스로 갈아타고 종점에 내린 다음 도보로 1시간 20여분 산길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딱 하루 코스다. 그래서 짐은 숙소에 맡겨 두고 크로스백만 메고 가볍게 출발했다.

도보로 산을 오르기 전에 물과 주먹밥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요리이나카행 버스를 탔는데 헨로상들이 보이지 않았다. 헨로상이 보이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다는 믿음이 생겨 안심이 되는데, 후덕한 인상의 일본 오바상(아주머니) 한 명만 중간에 탔을 뿐이었다. 버스를 잘못 탔나 하는 불안감에 오바상에게 “쇼산지 가는 버스가 맞냐” 물으니 맞다고 안심시켜줬다.

그것을 계기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다. 아주머니 이름은 이시즈카. 홋카이도 사람인데 시코쿠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녀가 가방을 뒤지더니 나한테 2000엔을 내밀었다. 당황해서 손사래까지 치며 극구 사양했는데, 아들과 내 차비를 꼭 내주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봉지에 싼 모찌(찹쌀떡) 두 개도 나눠 싸줬다. 억지로 쥐어주는 돈과 모찌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시즈카는 “오늘 당신을 만나 이렇게 오셋타이 할 수 있어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나한테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시골에 사는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늘 자신은 코보대사님께 공덕을 쌓은 것이라고 했다.

➊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행복관음상이 합장한 큰 손안에 서 있다.
그제야 이것이 예사롭게 들어 넘겼던 ‘오셋타이’라는 것을 알았다. 길 안내를 해준 남자의 친절, 시트가 젖어도 개의치 않았던 택시 기사의 너그러움, 생면부지 우리에게 차 한잔 권하던 시코쿠 사람의 모든 친절은 코보대사에 대한 접대였고 그로 인해 함께 걷는 나도 호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시즈카 덕분에 시코쿠 사람들의 친절을 비로소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쇼산지행 버스 종점에 내리고 보니 가게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알아보니 뭔가를 사려면 요리이나카 종점에서 사야 했는데 갈아타는 버스를 놓칠까 봐 서두르느라 그냥 지나쳐버렸다. 아들과 나는 자기 페이스대로 가기로 하고 그냥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들이 앞섰는데 곧 내가 앞질렀다. 당시 체력이 바닥이었지만 수년간 북한산과 우면산을 다닌 덕분에 진가가 나타났다.

한참 오르다 보니 눈앞의 나무에 의미심장한 푯말이 붙어 있었다. 인생에도 순례에도 산도 있고 계곡도 있다는 의미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평탄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순례길 곳곳에 유명한 하이쿠(5·7·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단시(短詩))들이 이런 푯말이나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그 짧은 글귀에 위로받으며 아들을 기다렸지만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 없지 않나. 걱정이 돼 내려가 보니 아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발을 접질렸다고 했다. 아들은 나를 의지하기도 하고 깨금발을 하기도 하면서 기다시피 쇼산지까지 가느라 온몸이 땀과 흙투성이가 됐다.

내려갈 일이 걱정이었다. 납경소 스님에게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숙소로 돌아와 발 마사지를 받고 파스도 사서 발랐지만 아들의 발은 신발을 신을 수 없을 만큼 부어올랐다. 결국 아들은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인천행 비행기는 이틀 뒤에나 있었다. 다음 날 하루를 날릴 수 없어 혼자서라도 순례를 한다 하니 아들은 13번 다이니치지(大日寺)는 시내에서 가까우니 함께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13번까지 가는 동안 절뚝거리는 아들은 내 보호자가 아니라 짐이었다.

13번이 의미 있던 이유는 한국의 전통 승무와 살풀이로 유명한 김묘선 스님 때문이다. 묘선 스님은 일본 공연 중 한국 전통 춤에 반한 다이니치지 주지 스님 구애를 받아 결혼까지 하게 됐다. 일본 진언종 스님들은 결혼해서 처와 자식을 둘 수 있다고 한다. 결혼 후에는 스님의 유언으로 불가에 귀의해 절을 물려받았다. 우리가 갔던 날은 묘선 스님이 외유 중이라 뵐 수는 없었다. 이런 만남도 인연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➋ 다이니치지 앞에 있는 김묘선 한국전통무용연구소 사무실. ➌ ‘인생과 순례에는 산도 있고 계곡도 있다’고 쓰여 있는 표지판이 나무에 걸려 있다. 순례길 곳곳에서 이런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시코쿠 사람의 모든 친절은 코보대사에 대한 접대

다이니치지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행복관음상이 있는데 아들 몰래 혼자서라도 순례를 잘 마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다음 날 아들은 돌아갔고 나는 혼자가 됐다. 나는 씩씩하게 혼자 14번 조라쿠지(常樂寺)를 향해 갔다. 조라쿠지는 미륵불을 본존으로 모신다. 절 이름처럼 항상 즐겁기를 소망하며 처음으로 초즈야에서 의식을 행하고 초를 사서 밝혔다. 그리고 혼자서 17번 이도지(井戶寺)까지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다음 날 모든 짐을 챙겨 18번 온잔지(恩山寺)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도쿠시마역 앞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흰옷을 입은 순례자들이 많이 눈에 띄어 저절로 안심이 됐다. 내가 버스 시간표를 보고 있자 중년의 여인이 조금 있으면 버스가 올 것이라고 확인해줬다. 혹시 18번에 간다면 함께 걸어도 괜찮냐고 묻자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 그는 가나자와에서 온 기무라 구니코였고 그렇게 내 첫 번째 동행이 됐다. 그는 죽은 남편과 할머니,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순례에 나섰다고 했다. 하쿠이를 입고 삿갓에 지팡이, 즈타부쿠로를 멘 아주 가벼운 차림새였다. 64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배낭을 메고 순례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해 숙소를 정해놓고 가까운 사찰들을 순례하고 있다고 했다. 일종의 베이스캠프를 정해놓고 버스와 도보로 돌고 난 후, 다음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31일을 예정한 그녀의 꼼꼼한 일정표를 보니 내가 참 준비 없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잔지 산문을 통과한 순간부터 경건하고 엄숙해진 기무라 뒤를 따라 나는 본당에서 합장하고 형식적으로 초를 밝히고 바로 납경을 받으러 갔다. 기무라의 기도는 길었다. 기도를 마친 기무라는 나를 작은 사당 쪽으로 이끌었다. 코보대사의 어머니 타마요리 고젠을 모시는 사당이라고 했다.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할 때 이 절은 여인들이 들어올 수 없었다 한다. 아들을 보기 위해 멀리 가가와현에서 온 어머니는 코보대사를 만나지 못해 절 밖에서 울었고 그런 어머니 소식을 들은 코보대사가 17일간 폭포를 맞아가며 여인해금(女人解禁)을 빌었다고 한다. 대사의 기도가 이뤄져 어머니와 함께 절에 들었고 대사의 어머니는 그길로 불제자가 됐다고 한다.

사당에서 합장하면서 다음 사찰부터 나도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첫 동행이 돼준 기무라 덕분에 나도 차츰 진짜 헨로상이 돼가고 있었다.

[최현경 한국방송작가협회 부이사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4호 (2021.01.27~2021.02.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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