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 존엄이 곧 우리의 존엄이다

화성시민신문 2021. 1. 2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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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허민영이 말한다 "예방적 살처분은 AI 방역 대책 아냐"

[농부 허민영]

 
▲ 산안마을에서 크는 병아리  건강한 병아리가 병에도 안걸린다
ⓒ 권은성
 
"먼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무관심 속에 스러져간 죄 없고 고귀한 이천만 닭과 오리들의 영혼에 사죄의 묵념을 올립니다."

지난 20일 열린 '산안마을 예방적 살처분 관련 화성지역 시민토론회'에 참여한 이후 지금까지 마음이 편치가 않다. 토론회 이전에는 이 사안의 해결을 돕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의 마음이었는데 토론회 이후에는 '뭐라도 해야겠다'로 바뀌었다.

예상 이상의 참여 열기로 온라인 토론회 입장 자체가 어려웠다. 토론회라는 것이 참여인원 모으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데 이렇게 참여경쟁률이 센 지역 토론회는 처음 본다.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비윤리적 정책에 반기를 든 시민정신과 함께 화성시 산안마을 농민들이 어떻게 농사지어 왔고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며 이뤄온 정성과 수고가 어땠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더불어 이번 사안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얼마나 중차대한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다 할 묘안을 낼 수 없는 근본적으로 너무 어려운 문제였기에 원론적인 얘기를 들을 때는 미궁으로 더 빠져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토론회가 끝을 향해가며 사람들의 마음이 한 곳으로 모여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생기 있는 시민의 성토가 이어졌다. 어떤 전문가들의 현란한 지식과 말솜씨보다 가슴에 더 와 닿았다.

참사랑농장 농민의 발언 "예방적 살처분 명령을 거부하고 3번의 재판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한 가지를 지켰습니다. 우리 꼬꼬들을 살렸다"는 말처럼.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봐온 처참한 살처분 사진과 영상도 외면하고 싶었던 무뎌진 나의 생명에 대한 감각을 해동하듯 깨웠다.
 
'아, 우리가 인간이구나. 땅에 묻은 것은 우리의 생명의 동지구나. 닭의 존엄을, 다른 생명의 존엄을 지켜야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을 지킬 수 있구나.'

지금 이 시간 산안마을의 농부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순간을 지탱하고 있을까. 축산농업은 해보지 않아 선뜻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농사지어 생계를 이뤄가고 있는 포도농사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았다. 멀쩡한 포도나무 수천 그루를 뿌리째 뽑아 불태우라는 국가의 명령을 받고 잘 익어 수확한 포도수만 송이를 출하하지 못하고 쌓아만 놓고 있는 형국.

살얼음판을 걷는다는 것이 이런 마음일까. 수십 년을 길러온 나무다. 1년을 천년같이 길러낸 포도다. 그야말로 농민에게는 속이 타들어가다 못해 피눈물을 줄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돈도 돈이지만 농민에게 자신이 기르는 생명을 이유 없이 죽인다는 건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일 것이다.

행정의 철학 있는 책임을 촉구합니다

지난 25일 산안마을 닭 3만7천 마리의 살처분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을 환영하며 여러 행정 책임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사실은 너무나도 이치에 맞는 판결이다. '조류독감 발생 농가 3km 반경 이내의 가금류 농가 무조건적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획일적 방역지침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행정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이제 당장 남은 것은 살처분 명령의 철회와 농장에 쌓여있는 달걀 60만개의 유통이다. 살처분 명령 철회에 대한 행정소송판결이 3개월 후에 이뤄진다는데 그때는 이미 너무 늦다. 계속 쌓여가는 저 멀쩡한 달걀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산안마을 농장이 조류독감의 확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근거가 없다면 더 이상 시일을 미루지 말고 즉각적인 예찰지역 전환, 달걀 유통 허가, 살처분 명령 철회를 전향적으로 결단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살처분과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끔찍한 방법 외에는 방역이 불가능한가를 재고해야 한다.  

달걀 한 알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닐 거다. 그 안에는 닭의 온 영혼이 담겼으며 농민들의 온 인생이 담겼고 거대한 우주의 온 에너지가 담겼다.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이 아파오는 듯하다. 산안마을 농민들이 정신 줄을 붙잡고 이 야만적인 살처분 명령에 항거하며 차분히 대응해나가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다. 아니 사실 농민의 입장에서 너무나도 안쓰럽다.

우리들의 자성과 변화가 먼저 필요해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작년 6월 13일 방송된 tvN '식량일기 닭볶음탕 편'에 출연해 이런 말을 했다.
 
"잡아먹는 게 꺼림칙하지 않나.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시킨다.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도축하는 것을 한군데 다 몰았다. 삶의 공간엔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할머니랑 닭을 잡은 적이 있다. 할머니가 닭을 잡아서 목을 꺾어서 제 품안에 줬다. 할머니가 식칼로 목을 땄다. 닭의 목숨이 달아나는 걸 몸으로 느꼈다. 닭을 먹을 때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한 생명을 앗아가면서 먹는 일이다."

달걀 한 알 도매가 100원, 닭고기 한 마리 1천원~2천원. 도대체 한 농가에 몇 마리의 닭을 키워야 농민의 생계가 가능할까. 조금 더 비싸게, 조금 더 행복하게 키운 고기와 달걀을, 지금보다 더 적게, 부족한 듯 먹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농가는 무리한 케이지 사육을 포기할 수 있고 정책 변화의 요구에도 더 힘이 실릴 수 있다. 농민도 축산문화 회복의 주체가 되어 닭을 귀하게 대하자. 더는 시장경제의 논리에만 끌려 다니지 말고 생명을 키워내고 생명을 먹여 살리는 농부 본연의 고귀한 역할을 해내자.

동물, 식물, 사람이 다 같이 더불어 사는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봤던 광경이 떠오른다. 어느 길에나 흑돼지 가족이 풀을 뜯으며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씩씩하게 병아리부대를 마을 곳곳 이끌고 다니는 엄마 닭의 비장함.

어떤 동물도 자신의 가족과 떨어져서 살지 않는 모습에 동물의 권리, 생명의 권리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닭을 닭장 속에 가두어 키우지 않아도 닭과 고양이와 개가 한 집에서, 한 마을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은 마치 판타지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에 비해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지만 산안농장을 시작으로 한 축산방역의 변화는 축산문화와 인류문명의 오래된 미래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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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성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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