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을 걷다 만난 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차노휘 입력 2021. 1. 2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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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제주 올레] 제2코스-광치기-온평 올레(총 15.6km)

[차노휘 기자]

 밭담이 양쪽으로 나 있는 올레길
ⓒ 차노휘
제2코스를 생기 있게 해주는 빗방울
    
"그러면 그렇지, 이 정도는 뿌려줘야지."

제2코스 대수산봉(大水山峰, 137m)을 내려와서 중산간 밭길을 걸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자 내가 되레 신이 났다. 잽싸게 배낭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다. 비의 전조는 한 시간 전부터 있었다. 3시부터 내린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먹구름이 정오가 되기 전부터 11시 방향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의외로 비가 밋밋한 길에 생기를 주었다. 제1코스 종점이자 시작점인 광치기 해변에서의 출발은 평안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19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제주형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행정조치에 따른 주요 관광 명소 출입금지(2020년12월24일~2021년1월3일)' 시행에 따라 '꽤 괜찮은 오름'까지 올라갈 수 없게 했다.

제2코스 첫 오름인 식산봉(食山峰, 60m)을 아예 코스에서 제외시켰다. 우회길을 거쳐 중간 스탬프가 있는 제주동마트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버렸다. 무인 감귤 좌판에서 1000원 주고 감귤을 사고 운동 삼아 대수산봉 오름 주위를 걷는 현지인과 반갑게 대화도 했지만 중산간 길에서 만난 빗방울만큼이나 생기 있지는 않았다.

비는 비였다. 후두둑, 떨어지는 비는 먹구름을 동반했다. 새까만 밭담과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게 밭 안에서 자라고 있는 무청은 밭 한쪽 소나무를 또렷하게 보이게 한 반면 먼 풍경은 먹구름으로 가두었다. 지나쳐 온 개 사육장에서는 개들이 한꺼번에 짖어댔다.

풍경이 좁아지고 더욱 낯설어지면서 길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했다. 곧이어 쏴, 한꺼번에 쏟아지는 빗방울을 정수리에 이고 길을 재촉하자 이어폰을 끼고 앞서가는 사람과 가까워졌다. 그는 우비가 없어 온통 비에 젖었지만 빗속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동질감에서인지 활짝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내 안의 두 자아
  
 대수산봉을 지난, 옛날 목장 길
ⓒ 차노휘
 
밤사이 비는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로 변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정원수로 심어진 야자수가 눈꽃을 피우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밋밋한 길에 비가 생기를 더했다지만 눈보라 치는 날에 걷는 것은 무리였다. 중산간 길은 체인을 장착하여도 소형차는 다닐 수 없다는 문자 메시지를 스마트폰에서 확인한 터였다.

다행이라면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중산간이 아니었다. 서귀포시 표선(西歸浦市 表善面) 바닷가 근처였다. '내 속의 나'는 곧 상반된 의견으로 서로 다투었다. 이런 날씨에 걷는다는 지나친 욕심이야. 바깥 길냥이들과 놀면서 하루를 느긋하게 보내도 되잖아?

머물고 있는 펜션은 원형 모양이었고 중간 중간 나 있는 창문을 통해 살찐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날, 재미 삼아 식사하고 남은 소시지를 정원 탁자에 놓아두었더니 고양이들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만 어슬렁거렸다.

'또 다른 나'는 느긋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지나친 사치라고 반박했다. 하루 종일 실내에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지루해서 견뎌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또 다른 자아'가 금방 대거리를 했다. 네가 신고 온 신발을 생각해봐?

애초 올레길 걷기 계획은 거창했다. 배를 타고 지프차를 가지고 와서 멋지게 '차박(車泊)'을 할 생각이었다. 여행 콘셉트는 코로나 바이러스19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늘 현실은 이상을 배반했다. 애초 한 달 잡은 '걷기' 계획은 현실적인 일로 1주일로 바뀌었고(1차 걷기) 겨울 추위 또한 만만치 않아서 도저히 차 안에서 밤을 보내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항공편을 이용하고 차는 렌트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짐은 가급적 덜 가져가기로 했다. 운동화는 가벼운 조깅화를 준비했다. 비교적 평탄한 올레길을 훌훌 날 듯이 걸으면 되겠지 싶었다. 조깅화가 방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통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은 나였다. 전날도 비가 와서 조깅화가 쉽게 젖었다. 눈보라가 치는 날 또한 신발이 제일 먼저 젖어 내 발을 하루 종일 질척거리게 할 거였다. 티격태격 내 안의 두 녀석이 싸우더니 드디어 강한 녀석이 이겼다.
 
 무인 좌판대
ⓒ 차노휘
 
가자! 첫날 눈은 쌓이지 않으니 도로가 얼지도 않을 거야. 온평 포구까지 운전해서 갈 수 있잖아?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하자. 내일도 눈이 온다고 하는데 쉬려면 내일 쉬는 것이 어떠니?

나는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고양이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혼인지가 있는 온평리  
 
 온평 포구로 가는 길
ⓒ 차노휘
 
2코스 종점이자 3코스 시작점인 온평리는 서귀포시 성산읍에 위치한다. 오름이나 하천이 없고 대부분 암반으로 된 밋밋한 평원이다. 혼인지(婚姻池) 전설과 관련되어 '여온리(與溫里)'라 부르다가 '온평리(溫平里)'로 불리는, 제주도 해안 마을 중 해안선의 길이(6km정도)가 가장 길어서 태풍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자연마을이 주로 형성되었다.
온평리를 걷다보면 혼인지와 관련된 상업적인 장식물을 볼 수 있다. 2010년부터 '혼인지 축제'라는 마을 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제주도에서 혼인지 전설은 그 비중이 크다. 제주 개국 신화일 뿐만 아니라 농경생활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그 전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혼인지가 있는 온평리
ⓒ 차노휘
 
옛날 옛날에 제주도에 세 신인(神人; 제주시 삼성혈에서 솟아난 고·양·부(高·梁·夫))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황량한 들판에서 가죽옷을 입고 주로 사냥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루는 자줏빛 흙으로 봉하여진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했다.

나무함을 건져 열어봤더니 그곳에는 돌함이 들어 있었다. 돌함에서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가 나왔다. 송아지와 망아지가 세 처녀의 뒤를 따랐고 그 바닥에는 오곡 씨앗이 들어 있었다. 이 세 여인은 동쪽 나라 벽랑국(碧浪國; 전남 완도군에 위치했던 나라)의 공주들이었다.

세 신인은 세 공주를 맞이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나이에 맞게 세 공주를 각각 맞이하여 연못에서 목욕하고 혼례식을 올렸다. 목욕하고 혼례를 올린 곳이라 하여 '혼인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제2코스가 끝날 즈음에 혼인지 전통 혼례관 건축물 뒤로 그 연못이 있다. 겨울이라 연못 주위로 마른 풀과 낙엽이 스산하게 흩어져 있었지만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비현실적인 풍광을 연출하는 혼인지
ⓒ 차노휘
 
휘날리는 눈을 와이퍼로 걷어내며 도착한 온평 포구 또한 전날과 달리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박한 배들과 포구를 중심으로 띄엄띄엄 있는 카페와 식당 건물들은 내리는 눈이 그 윤곽을 지우고 있었다.

나는 혹시 3코스를 끝냈을 때 차를 가지러 오지 못할 것을 대비해 식당 앞에 양해를 구하고 주차를 했다. 그리고는 먼 옛날 바다에서 떠내려 온 나무함을 발견한 세 신인들처럼 약간은 두렵지만 신비에 가득 찬 눈으로 앞으로 걸어야 할 올레길 제3코스를 바라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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