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인플루엔자 옮길라.. 반갑지 않은 기러기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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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남 기자]
시골 노인회관은 동네 사랑방이나 마찬가지다. 농한기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TV도 보고, 점심도 나누며 소일을 한다. 요즘은 '코로나19' 방역으로 마을회관 노인정 문이 굳게 잠겼다. 노인정 출입마저 없으니 시골길에서 사람 발길이 뜸하다.
팔순을 넘긴 이웃집 할아버지께서 하도 답답하신지 내게 들길 산책이나 가자고 한다. 어르신은 마스크를 쓰고 옷을 단단히 껴입고 나왔다. 마침 몸이 찌뿌둥하던 참에 할아버지 길동무가 되어 산책에 나섰다.
겨울 들녘의 주인공, 기러기
겨울 들녘은 쓸쓸하다. 들판에 푸른 벼가 자라고, 누런 곡식이 황금벌판으로 넘실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몇 걸음 안 떼 황량한 들녘에 진을 치고 있는 무리가 보인다. 요즘 제집 드나들 듯 얼굴을 보여주는 쇠기러기떼이다. 쇠기러기는 추수가 끝난 늦가을에 찾아와 떼지어서 몰려다닌다. 허허로운 들판에 새떼가 모여드니 생기가 돈다.
"요 녀석들 때문에 요즘 논 주인이 따로 없는 것 같아요."
▲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먹이 사냥에 여념이 없는 쇠기러기떼. 주로 벼 낟알이나 벼 구루터기를 먹는다. |
ⓒ 전갑남 |
▲ 수백마리가 한꺼번에 비상할 때는 장관을 이룬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커다란 합창이 되어 하늘로 펴진다. |
ⓒ 전갑남 |
쇠기러기는 우리나라 겨울 들녘에서 흔히 만나는 겨울 철새이다. 추운 유라시아, 그린란드의 북극권에서 번식하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중유럽, 북아메리카 중부 등에서 월동을 한다. 겨우 내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다 4월 초순쯤 우리 곁을 떠난다. 이마는 흰색을 띠고, 부리는 길고 분홍색이다. 몸 전체가 암갈색인데, 아랫면에 검은 줄무늬가 있다.
▲ 뒤뚱뒤뚱 먹이사냥을 하는 기러기. 이럴 땐 조용하다. |
ⓒ 전갑남 |
▲ 가까이 서 본 쇠기러기. 상당히 몸짓이 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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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경계의 눈초리가 매섭다. 보초병이라도 세워놨을까?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한쪽으로 시선을 모은다. 우리도 멈춰 섰다. 녀석들, 의심을 거두었는지 자기들 할 일을 다시 한다.
▲ 기러기는 경계심이 많다. 가까이 가면 일제히 하늘로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른다. |
ⓒ 전갑남 |
기러기에게서 배우는 덕목
할아버지와 나는 기러기떼의 힘찬 날갯짓의 역동성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두를 것 없는 발걸음에 여유를 두었다.
"기러기한테는 배울 게 많다는 것 알지?"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알아요."
"뭘 아는 데?"
"빨리 혼자 가지 말고, 멀리 갈 땐 함께 가자! 이거죠."
▲ 일정한 대형을 이뤄 하늘 높이 날으는 기러기떼. |
ⓒ 전갑남 |
할아버지는 내 이야기 끝에 예전 당신의 전통 혼례식 때의 추억을 떠올린다.
"나 결혼할 때 말이야, 혼례상에 목각 기러기를 올려놓고 예를 치렀지! 기러기는 한번 맺은 인연을 영원히 지킨다는 덕목을 기리라는 뜻에서!"
할아버지는 갑자기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 상기된 얼굴이다. 전통혼례에서 기러기가 등장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기러기는 보통 15~20년을 사는데, 어쩌다 짝을 잃으면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고 한다. 기러기의 일편단심. 결혼으로 맺은 인연을 변치 않은 사랑으로 백년해로(百年偕老)하라는 뜻에서 기러기를 혼례상에 등장시킨 것 같다.
▲ 마을 가까이서 먹이 사냥을 하는 기러기떼. 요즘 AI 방역 때문에 눈총을 받기도 한다. |
ⓒ 전갑남 |
"맘껏 주워 먹으라고 냅두시지?"
"여기서 얼마 안 되는 곳에 양계장이 있잖아."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놈이 있을까 봐서요?"
"그렇지."
야생 기러기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를 옮기는 범인으로 의심까지 받을 줄이야! 요즘 AI 때문에 닭이나 오리와 같은 사육조류 농가가 비상이다. AI는 사육조류뿐만 아니라 기러기와 같은 야생조류까지 전염이 되는 무서운 병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조류의 호흡기 분비물이나 분변 등이 AI 확산을 키우는 매개체로 알려졌다. 바이러스 독감이 야생조류에서 사육조류까지 감염되어 막대한 손해를 끼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긴 여행길 고단한 날개를 접고 들녘에서 쉬어가는 기러기. 사람에게 아름다운 덕목도 가르쳐준다. 그런 기러기가 AI 전염병 때문에 곱지 않은 눈총을 받고 있다. 방역을 위해 양계장 인근 논을 갈아엎고 기러기 접근을 막으려 한다.
들길 산책을 마치면서 할아버지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긴다.
"사람은 코로나에 시달리고, 가금류에는 AI가 말썽이고,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자연이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할 텐데 말이야. 인간이 너무 편하게 살려고 자연에 죄지은 게 많아서인가?"
나도 한마디.
▲ 아름다운 기러기의 군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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