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조건 갖춘 남자에게 이별통보, 이유가 멋졌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말>
[송주연 기자]
JTBC <런온>은 로맨스 드라마다. 권력과 부를 모두 갖춘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들 선겸(임시완)과 가족이라는 배경을 가져본 적이 없는 미주(신세경). 이 선남선녀의 러브스토리는 뻔한 '백마 탄 왕자님과 구원받는 공주 스토리'로 귀결되기 쉬운 설정들이다.
나는 이런 구도를 매우 싫어한다. 현실을 반영하지도 못하거니와 자칫 여성이 수동적인 입장에 놓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엔 빠져들었다. 게다가 그 '빠져듦'의 방향이 엉뚱했다. 이성애자인 나는 로맨스 드라마를 볼 때면 아무래도 멋진 남자주인공이 먼저 눈에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가 이 작품을 보면서 빠져든 대상은 드라마 속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사랑에 빠지면 지나치게 헌신하는 다른 드라마 속 여성들과 매우 달랐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을 지켜가는 일에 한 치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는 <런온>의 여성들. 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매주 내게 흐뭇함을 선사하고 있다. <런온>의 여성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따라가 본다.
▲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에 결코 게으르지 않은 <런온>의 미주와 단아 |
ⓒ JTBC |
그런데 미주는 달랐다. 그녀는 상대방의 반응에 신경쓰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두고 성찰한다. 선겸과 썸을 타는 동안 미주는 종종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선겸의 마음을 얻지 못할까봐'가 아니다. 미주는 10회 자신의 마음에 대해 동거인인 매이(이봉련)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진짜 지질한 거 같아. 정작 나도 내 마음 전할 수 있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으면서 거절 당하고 다시 못 보는 게 두려워서 그래서 못하고 있었으면서 그 사람은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라고."
즉, 지질한 자신의 모습에 더 괴로워했다는 의미다. 이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기 마련인 '썸'의 단계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초점을 잃지 않는 미주의 매력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이런 미주는 선겸과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한 후에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다. 데이트 도중 선겸을 서운하게 했다는 판단이 서면 곧바로 "미안해요.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말하면 되는데 매번 말을 그렇게 꼬아서 뱉고 나 스스로도 참 모나고 못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11회)라고 솔직히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표현한다. 또한 12회 기정도(박영규) 의원이 찾아와 "내 아들을 망치지 말라"며 무례하게 군 후에도 미주는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건 나밖에 없어요"라며 자신의 기분을 선겸에게 투사하거나 책임지라 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분과 삶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는 매우 현명한 태도였다.
전통적인 성 역할의 틀 깨는 단아와 지우
재벌이라는 '가진 자의 세계'에 속한 단아(수영) 역시 전통적인 '재벌 딸'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다른 많은 드라마들에서 재벌 딸들은 대체로 잘나가는 남편을 통해 그룹을 이어받고 이를 통해 권력과 부를 누려왔다. 하지만 단아는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자신이 욕망하는 바를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이를 표현하고 충족시킴으로서 스스로를 지킨다.
11회 미주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으며 단아는 "내 세계에서 나는 약자거든. 언제 가진 거 약탈 당할지 몰라서 성벽 쌓는 게 일"이라며 자신의 무례해 보이는 듯한 태도의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이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답변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단아는 마음에 품고 있던 영화(강태오)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매우 정확하게 털어 놓는다. "니 그림을 보고 싶은 욕구 그리고 널 보고 싶은 감정 이 두 개가 상충해"라고.
또한, 미주와 마찬가지로 연애를 하면서도 초점을 상대방이 아닌 내 마음에 둔다. 12회 영화와의 만남에 늦게 나타난 단아의 첫마디는 "거슬려. 없는 시간 내서 너 보러 온 것도 그마저 10분 늦은 게 불편한 것도 다"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해 '기분을 맞추려' 들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면서도 '늦어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는 단아의 화법은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선겸의 어머니이자 유명 영화배우인 지우(차화연) 역시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영부인이 되고 싶지 않냐"는 남편 정도의 말에 "그런 거까지 하면 벌 받는다"며 선을 긋는다(7회). 남편의 들러리가 아닌 스스로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녀는 자녀들 역시 각자의 삶의 주체로 대한다.
▲ 선겸의 어머니 지우는 스스로와 자녀 모두를 각자의 삶의 주체인 독립된 한 사람으로서 대한다. |
ⓒ JTBC |
'선'을 넘는 사람들에게 대처하는 법
이렇게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이들은 '선 넘는' 타인의 행동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미주는 5회 친구의 결혼 축하 모임에 참석한다. 그 자리에서 결혼을 앞둔 친구는 미주에게 대놓고 "넌 왜 결혼 안 해?"라고 묻는다. 그러자 미주는 이렇게 되묻는다. "넌 왜 결혼해?" 친구는 이 질문에 자신이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내가 왜 이걸 설명해야 하냐"고 답한다. 미주는 이에 "그걸 왜 역질문을 받고 깨달아?"라고 일침한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듯, 결혼 안 하는 사람들 역시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 즉 각자의 방식은 그저 존중해주면 되는 것이지 자신의 관점으로 평가하거나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셈이었다. 미주의 '역질문'은 쓸데없이 선을 넘어 오는 사람들에게 대처하는 매우 현명한 방법이었다. 미주는 국회의원 정도에게도, 재벌 집 딸 단아에게도, 그 누구든 함부로 자신을 침범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단아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밀어내는 사람들에게 즉시 단호하게 대처한다. 자신에게 "집 안 사업에 도움 되고 싶으면 그만 나대고 시집을 가. 혼맥으로 효도해야지"라고 막말을 날리는 배다른 오빠에겐 "너나 나나 최고경영자가 되고 싶지. 근데 내가 하면 비정상이고 니가 하면 정상이래. 너랑 나랑 타고나고 딱 하나 다른 거 성별인데"(5회)라고 상황을 명쾌히 정리해 되받아친다. 단아는 다른 장면들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받을 때마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그녀가 내뱉은 대사들은 속을 종종 가슴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의 반영
이렇게 자기 자신을 지켜가는 <런온>의 여성들의 모습은, 이 드라마가 실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기에 더 진실되게 느껴진다. 3회 선겸의 통역을 위해 제주도를 방문한 미주는 밤에 리조트를 산책하다 뒤에서 달려온 선겸을 치한으로 오해하고 무척이나 놀란다. 이는 밤길을 걷는 것이 두려운, 심지어 리조트에서조차 밤에 혼자 다니는 것이 두려운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성 둘이 사는 미주의 집의 현관에는 남자 신발이, 베란다에는 남자 옷이 걸려 있는데 이 역시 여성이 느끼는 폭력에 대한 불안을 잘 표현한 부분이었다.
▲ 미주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 이라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겸에게 이별을 고한다. |
ⓒ JTBC |
그럼에도 이 드라마의 여성들은 결코 스스로가 대상화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먼저 돌보고,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에 게으르지 않은 '런온'의 여성들. 이들의 모습은 자꾸만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12회에서 미주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선겸과 헤어지려 했고, 단아는 영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과연 이들의 사랑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이 여성들이 어떤 길을 가든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길,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학교에서 동성애..." 마이클 조 설교 후 안디옥교회가 뿌린 문자
- [단독] 여가부 예산으로 '엉터리' 제주도 워크숍 간 미혼모단체
- 종근당 갑질 논란 확산... "담당 직원 죽기까지"
- "문재인=박근혜"라는 미 부차관보... 한미공조 빨간불?
- '막장'에 열광하는 사람들 심리, 단순하진 않았다
- 연일 뜨거운 조수진의 말 "후궁, 왕자, 이런 대우" [오뜨말]
- 사법농단 4년 만에... '법관 탄핵' 열차 출발한다
- '법관탄핵' 반대로 뭉친 국민의힘·국민의당
- 박재호 "부산 시민들, 조·중·동 너무 많이봐 한심" 논란
- 황운하 "공수처, 청 울산시장 선거개입-고래고기 사건 수사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