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정치 여론조사의 과잉

2021. 1. 29. 04: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손병호 논설위원


한국은 여론조사 공화국이다. 특히 정치 여론조사가 차고 넘친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결과가 발표된다. 선거철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연중무휴다. 외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선 후보감이라는 이들은 주식시세표마냥 연일 지지율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어떻게 그리 자주 변하고 순위도 엎치락뒤치락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대통령 국정 지지율도 마찬가지다. 뭔 일이 생기기만 하면 금세 지지율에 연동된다. 알파고의 실시간 바둑 승패 계산 능력보다 더 뛰어난 게 매일매일 달라지는 한국의 여론조사일지 모른다.

여론조사는 결과가 나오는 순간 정치가 된다. 특히 정치적 갈등 사안,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현안, 대통령 지지율, 대선 후보나 정당 지지율 같은 민감한 조사 결과가 나오면 순식간에 수백개의 뉴스가 생산되며 정치적 논쟁을 가열시킨다. 어떤 때는 민심이 여론조사에 반영되는 게 아니라 여론조사가 민심의 방향을 정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여론조사가 그 자체로 일종의 정치행위를 하는 셈이다. 실제 배지만 안 달았을 뿐 여느 국회의원에 버금가는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너무 잦은 여론조사가 너무 잦은 정쟁과 공방을 야기하거나, 정치와 국정을 너무 갈팡질팡하게 하는 건 아닐까. 조사업체마다 결과가 전혀 딴판인 건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조사 결과가 정쟁과 대결의 재료로 쓰이는 경우다. 얼마 전까지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을 다룬 조사들이 많았다. 조사 결과가 어느 쪽이 더 옳고 그르냐 하는 판단 기준이 됐다. 좋게 해석하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곁에서 싸움을 부추기는 ‘나쁜 친구’의 역할을 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법무부-검찰 각각을 지지하는 비율이 양분될 때 특히 그랬다. 기본적으로 ‘싸움’에 대한 여론조사여서 숫자가 나오는 순간 싸움을 환기시키고 양쪽 지지층의 전의를 불태우게 한다.

너무 잦은 정치 여론조사는 사회의 관심을 너무 정치 쪽으로 쏠리게 하는 부작용도 있다. 순위를 가려내는 여론조사 결과와 이에 대한 경마식 보도가 다른 어젠다를 집어삼키는 블랙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논쟁적 사안이 생겼을 때 여론조사가 툭 치고 들어오면서 공론화 과정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재난지원금 문제가 그렇다. 재정 상황과 지원에 따른 효과, 지원 분야 등에 대한 세심한 논의가 필요한데 ‘지원해줘야 한다’는 답변이 압도적인 조사 결과가 나오는 순간 공론화 과정은 의미가 없게 된다. 조사 결과가 그러한데 지급을 반대하면 역적이 된다. 그렇게 영향력이 큰 게 여론조사인데, 과연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고 국민들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미국 여론조사 업체 갤럽을 설립한 조지 갤럽은 여론조사를 ‘민주주의의 맥박(Pulse of Democracy)’이라고 불렀다. 여론조사가 민주주의를 기능하게 하고,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면서 여론조사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 봉사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짜 그래야 한다. 여론조사는 민심을 읽어내는 중요한 수단이고, 정치가 더 잘 굴러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 그런데 지금 쏟아지는 한국의 정치 여론조사들이 과연 얼마나 민주주의에 봉사하고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결코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오히려 의도하진 않았겠으나 ‘시끄러운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민주주의가 시끄럽거나 정치가 갈팡질팡하지 않게 하려면 정치 소비자들이 여론조사에 너무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여론조사에 대한 가치를 덜 두고 그런 뉴스 소비를 조금은 줄여볼 필요도 있다. 또 여론조사를 스냅사진 정도로만 여겼으면 한다. 움직이는 피사체를 재빨리 찍으면 간혹 건질 만한 사진도 있지만, 초점이 맞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조사 업체들도 조사를 남발하면 조사에 대한 권위나 신뢰도를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테다. 물건을 시도 때도 없이 마구 찍어 팔다보면 결국 값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조사를 하기 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조사인지 한번쯤은 고민해봤으면 한다. 민주주의의 맥박, 참 멋진 말 아닌가. 머지않아 한국의 여론조사도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