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라드 칼럼] 현실 부정의 위험에 빠진 북한

2021. 1. 29.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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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코로나 위기에 외부 탓만
폐쇄성 짙어져 협상 난항 예상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북한에 가장 중요한 최근의 사건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도, 제8회 당대회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 당대회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북한이 직면한 두 가지 문제는 점점 심각해진다. 하나는 경제난이다. 1월 22일 유엔식량농업기구 보고에 따르면 2016∼2019년 북한 인구의 46%가 영양실조 상태에 빠졌다. 다른 하나는 코로나19 확산 가능성이다. 이는 북한의 열악한 의료 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에서 4년마다 개최되는 주요 지도자 회의인 이번 당대회에서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신뢰할 만한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5개년 경제정책이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했다”며 문제를 시인했다. 그러나 개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적 활동을 허가해 경제 침체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정책 대신에 국가적 통제 강화와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경제정책 실패의 탓을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 자연재해, 코로나19 등 외부적 요인으로 돌렸다. 코로나19에 대해서는 북한에 확진자가 없다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군사력 강화를 강조했다. 당대회 기념 열병식에서는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공개됐다. 실재하는 위험한 문제는 외면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무기를 계속 개발하기로 굳게 결심한 듯하다.

이런 비현실적 위기 대응 방식이 왜 북한에서 반복되는 것일까. 북한 지도부는 정권 존립을 위협받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마치 자동차 전조등 불빛에 놀라 피하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얼어붙은 토끼처럼 행동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경제 침체를 해결하려면 시장을 활성화해야 하고, 코로나19에 맞서려면 전문가의 도움과 백신 지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 정권은 둘 다 하지 못한다. 북한 정권은 경화증(硬化症)에 걸렸다. 좀처럼 안전지대 밖으로 나오거나 합리적인 새 정책을 추진하려 하지 않는다. 대담한 새 출발을 시도하려면 권위에 손상을 입지 않은 당당한 지도자가 필요한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그런 위치에 있는지가 분명하지도 않다. 게다가 북한에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극히 부족하다.

북한 정권은 강한 압박을 받으면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움직인다. 그들은 폭력적인 열강에 대항하여 싸우는 국제적인 희생양이고, 최고 통치자는 신(神)처럼 오류가 없고, 지도부의 결정은 항상 최선의 선택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거스르는 불쾌한 현실에 직면하면 현실을 부정하며 합리화를 시도한다. 북한 엘리트층은 폐쇄된 사회에서 확고한 권력을 쥐고 있다. 설령 그 폐쇄 집단 내에서 현실에 입각한 반대 의견이 표출되더라도 그것은 곧바로 기성 지도자들의 주장에 짓눌린다. 노동당은 그들의 신조와 충돌하는 현실에 근거한 결정을 내릴 능력을 상실했다.

이번 당대회에서 나타난 북한의 대처는 그들이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워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북한은 더욱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외부 세계와 진지하게 소통할 가능성이 작아졌다. 대외 관계를 전면적으로 확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 힘쓰겠다는 뜻에 가깝다. 북한 미국과의 단계적 협상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김 위원장은 한국 정부가 한반도의 ‘본질적인 평화의 문제’에 집중하고 첨단 군사장비 반입 및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할 때 남북 관계에 진전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북 관계 경색을 한국 정부의 책임으로 돌린 것이다. 설령 한국이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 해도 북한이 진지하게 대화에 임할 것 같지도 않다. 한국 정부를 향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기괴한 족속들”이라고 한 김여정의 발언이 오히려 솔직한 표현일 수도 있다. 험난한 앞날이 예상된다.

존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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