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1300년 내려온 오만과 편견.."조선은 우리의 신하"

2021. 1. 29.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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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부터 황제국 자처한 일본
조선침략은 '신국의 위업' 주장해
임진왜란·한국병탄 논리로 활용
천황 vs 일왕, 어디에 무게 실을까


일본의 한반도 폄훼

일본의 대표적 역사왜곡인 임나일본부설을 그린 두루마리 족자다. 4세기 일본의 신공황후가 왜군을 이끌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렸다. [중앙포토]

753년(신라 경덕왕 12년) 1월 1일, 당나라 봉래궁(蓬萊宮)에서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식장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 누가 더 서열이 높은 자리에 서느냐를 놓고 빚어진 갈등이었다. 애초 당 조정은 서반(西班)의 서열 1위에 토번(吐蕃) 사신, 2위에 일본 사신을, 동반(東班)의 서열 1위에 신라 사신, 2위에 대식국(大食國) 사신을 배치했다. 그런데 일본 사신 대반고마려(大伴古麻呂)는 “신라는 옛날부터 일본에 조공하는 나라인데 일본 사신보다 윗자리에 서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당 관리들에게 항의했다. 당 조정의 책임자 오회실(吳懷實)은 부랴부랴 일본 사신과 신라 사신의 자리를 바꿔준다. 당 조정에서 누가 더 높은 대접을 받느냐를 놓고 신라와 일본 사신이 벌인 이 다툼을 ‘쟁장(爭長) 사건’이라고 부른다.

쟁장 사건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 사신이 신라를 자신들의 조공국으로 규정했던 사실이다. 말하자면 일본은 황제국이고 신라는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번국(蕃國)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자국을 높이고 신라를 비하하는 의식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공식화된다. 『일본서기』 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조에는 ‘중애천황이 죽고 그의 부인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신라 정벌에 나서자 신라 왕이 일본을 신국(神國)으로, 일본 왕을 천황(天皇)으로, 일본 병사를 신병(神兵)으로 부르면서 항복한 뒤에 영원히 조공할 것을 맹세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신라 왕의 입을 빌려 일본을 띄우는 이 내용은 오늘날 일본의 사학자들도 명백하게 전설이라고 평가하지만, 이후 한·일 관계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고 심각했다.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멸시하는 인식의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720년 『일본서기』에서 천황제 절대화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천황제를 미화하고 절대화하기 위한 역사서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일본을 상국이나 황제국으로 섬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과의 관계가 악화하고 전쟁까지 벌이게 되면서 신라가 한동안 일본에 저자세를 취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과의 관계가 정상화하자 신라는 태도를 바꾼다. 734년 일본에 갔던 신라 사신 김상정(金相貞) 등은 스스로 왕성국(王城國) 사신이라고 칭했고, 격분한 일본 조정은 이들을 추방한다. 753년, 신라 또한 일본 사신 소야전수(小野田守) 등이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를 취하자 그들을 쫓아버린다. 신라가 이처럼 자신들을 ‘천황의 나라’로 인정하려 들지 않자 일본에서는 759년 신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이 등장했고 양국 관계는 단절된다.

신공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사진 위) 등이 하늘에서 1907년 한일신협약 조인 당시 이완용이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도장을 찍는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한상일·한정선 지음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에서]

공식적인 국교가 끊어졌음에도 일본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조공국이자 번국으로 여기는 일방적인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1079년, 고려는 문종(文宗)의 병이 깊어지자 일본 상인 왕칙정(王則貞)을 통해 일본에 의사의 파견을 요청한다. 일본 정부는 논란 끝에 고려의 요청을 거부한다. 고려가 보낸 문서에서 성지(聖旨·황제의 뜻)라는 용어를 쓴 것이 번국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신국’이자 ‘천황국’으로 자처하면서 한반도를 멸시하는 인식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세종대 조선이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비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에 나설 때 ‘신공황후의 전설’을 환기하면서 활용했다. ‘신국’ 일본이 조선과 명을 정벌하여 무위(武威)를 떨치는 것이야말로 신공황후의 위업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밑에서 외교 문서를 총괄했던 승려 이심숭전(以心崇傳·1569∼1633)은 조선에 대한 멸시관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조선은 일본보다 낮은 ‘개 같은 나라(戌國)’이므로 예로부터 일본 왕과 조선 왕이 국서를 주고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천황의 나라이고 조선은 그보다 한 등급 낮은 조공국이라는 인식을 드러냈던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 대등한 관계의 외교를 추구했다. 하지만 조선 국왕의 교섭 상대는 천황이 아닌 막부(幕府)의 장군(將軍)이었다. 조선은 양국 외교의 대등성을 확보하기 위해 장군의 호칭을 ‘일본국왕’으로 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일본은 응하지 않았다. 천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천황의 신하’인 장군을 조선 국왕의 교섭 상대로 유지해야 조선을 일본의 ‘신하국’이자 ‘번국’으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가 열두 차례나 일본에 갔지만, 통신사가 천황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근원적으로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부터 일본이 신국이자 천황의 나라로 자처한 것은 중국과는 대등하고 한반도보다는 한 등급 위에 있는 나라임을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나아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자국을 ‘무위(武威)의 나라’로, 조선을 ‘무비(武備)가 없는 허약한 나라’로 규정했다. 반면 조선은 스스로 중국과 가장 친하고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국이란 사실을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의 근거로 내세웠다. 일본은 조선을 ‘중국의 허약한 속국’으로 치부한 반면 조선은 일본을 ‘중화문명을 모르는 야만국’으로 매도했다.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근원적인 속내가 달랐음에도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 동안 조선과 일본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군사적 위협에 위기감이 높아졌던 일본 지식인들은 다시 천황을 불러낸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다. 그는 러시아와의 교역에서 잃은 것을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여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인은 “천황이 직접 다스리던 고대에는 한반도가 일본에 조공했는데 이후 오만해졌다”며 신공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업을 계승하여 조선을 차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을 정복하여 천황에게 무릎 꿇게 하는 것이야말로 본래의 국체(國體)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정한론’ 주장 요시다 쇼인, ‘천황’ 재소환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요절했지만 정한론은 그의 수제자 격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등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진다. 한반도 침략의 상징적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는 스스로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토 등은 한국을 침략하여 보호국으로 만들고 끝내는 식민지로 탈취함으로써 일찍이 신공황후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웠던 ‘신국의 위업’을 실현했던 셈이다.

이토 히로부미

실제로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메이지(明治) 천황은 “동양의 평화와 제국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 제국의 보호 아래 둔다”는 내용으로 이른바 병합조서(倂合詔書)를 내린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의 순종(純宗)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고종(高宗)을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책봉한다는 조서도 내린다. 8세기 이후 스스로를 신국·황국으로 칭하면서 한반도에 대해 황제 행세를 하고 싶었던 ‘천 년의 소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같은 해 11월,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된 잡지 ‘역사지리(歷史地理) 조선호(朝鮮號)’의 편집자는 감격에 겨워 발간사를 쓴다. “한국 병합은 실로 고대 이래 일본의 역사적 현안이 해결된 것”이라고 말이다.

이 같은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일본 국왕을 천황이라 부르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한국 정부가 1998년부터 외교적으로는 ‘천황’을 공식 용어로 쓰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일왕’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마침 얼마 전 신임 주일대사가 일본에 부임한 직후 ‘천황폐하’라는 호칭을 쓴 것을 두고 논란이 다시 분분하다. 천황을 둘러싼 갈등이 천 년 이상 누적돼온 한·일 간의 특별한 역사와 일본과의 우호를 유지해야 하는 이즈음의 현실 사이에서 과연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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