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왜요?"의 생활화

2021. 1. 29. 00:3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인미답의 코로나 위기 속
관성 끊어내는 동기 만들어져
근원적 질문 고민해야할 때
송길영 Mind Miner

얼마 전 만난 분들이 중학생 자녀들의 요즘 생활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내쉽니다. 방학 전 기말고사를 대면으로 치르는지 아니면 비대면으로 치르는지를 몰라서 학교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부터 아이가 온라인 수업을 받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식구들의 정신건강이 나빠지기 때문에 방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집집마다 코로나 시대의 교육 에피소드들이 한가득입니다. 하지만 한숨을 쉬시는 부모님들도 과거 자신들이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잡담하거나 낙서하거나 공상에 빠져있던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규 교육의 밀도 있는 수업을 받기 전의 아이들 역시 늘 새롭게 배우는 존재로 그 호기심은 수많은 질문과 함께합니다. “이건 뭐죠?”를 모든 사물을 접할 때마다 묻습니다. “밖에 나가려면 신발을 신어야 해”와 같은 생활의 방법들을 알려주면 “왜요?”라는 질문이 늘 따라붙습니다. 하루종일 “왜요?”의 파상공격에 시달리고 나면 녹초가 되어 “그냥”이라거나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라는 무성의한 답변을 하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합니다. 답이 궁한 일도 꽤 있는데 나도 그 연유를 모르거나 혹은 행위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지만 세상의 관행이 그러하기에 싫어도 따르고 있는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천진한 어린 사람들의 “왜요?”를 요즘 어른들이 묻기 시작합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며 “회사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에 “왜요?”라고 물어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이러스 전만 하더라도 “일하러 가는 것이죠”라는 이야기가 당연히 돌아왔을 터인데 집에서 일하는 근무가 현실화되고 나니 지금까지 왜 그렇게 매일같이 붐비는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녔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빅데이터 1/29

왜 그랬을까요? 그 방법 이외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라면 그 방법으로 시스템이 최적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회사에 모이는 행위를 모든 직원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사장님이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최후의 음모이론으로 인사관리팀이 사람들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을 관리하는 근태관리 업무를 맡고 있기에 그 업무가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 모든 질문과 의심을 뒤로하고 다시 원론으로 다가와 ‘일하기 위해서’라는 본연의 목적으로 집중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집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면 코로나 이후 회사로의 출근은 다시 해야 하는 일일까요? 방송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의 출연진 중 가족과의 삶을 위해 출퇴근의 수고를 감수하는 에피소드들이 보여지는데 이분들에게 지금의 재택근무는 축복과 같을 텐데 말입니다.

그 다음 “왜요?”는 어디로 향할까요? 재택으로 비대면 업무를 진행하며 일의 과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각자가 만든 자료들에 타임스탬프가 찍혀서 교류되며 ‘누가’ ‘무엇을’ ‘언제’ 했는지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누가 병목을 만들고 있고, 누가 기여가 많고 적은지 투명하게 보여지며 ‘관리’라는 업무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모두 함께’가 아니라 ‘모두 각자’ 일하는 체계가 만들어지면 자율권이 중시되고 개인의 역량이 요구되며 의사결정이 과학화됩니다. 무엇보다 각자의 기준으로 완성된 일들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왜요?”라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합니다. 다른 이들이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레짐작 속에 더 나은 삶의 방식을 포기했던 혁신의 예비군들이 이제 속속 우리의 일상에 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누적된 변화의 점진적 수용은 그만큼의 형식과 관습을 낳았습니다. 환경의 변화로 그 관습이 효용을 다할 때, 그 혁신으로 기대되는 효율은 또 다른 혁신을 추동합니다.

이제 우리 삶의 모든 단계마다 5살짜리 어린 아이처럼 “왜요?”를 묻기 바랍니다. 그리고 답으로 “그냥”이라고, 또는 “그렇게 해 왔으니까?”라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가장 나쁜 답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가 아닐까 합니다. 이 경우 정당한 답은 그 연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일 자체를 고쳐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서로 원치 않는 일을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선배 철학자가 이야기한 ‘최대 다수가 각자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서’라도 그 출발점인 “왜요?”의 생활화를 주장합니다.

송길영 Mind Mine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