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맞아떨어지는 시간'을 위한 인류의 여정
매년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한 ‘성 조지의 축일’ 전통과 두 문호의 사망일이 택일의 배경으로 꼽힌다.
두 문호는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스페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로, 두 사람은 1616년 4월 23일 사망했다고 기록돼있다. 영국과 스페인을 각각 대표하는 대문호가 공교롭게 같은 날 사망한 것을 기리는 의미가 4월 23일에 더해진 것이다.
하지만 기록과 달리 두 사람의 실제 사망일은 일치하지 않는다. 달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율리우스력을 썼지만, 스페인은 그레고리력을 사용했다. 현재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은 1582년 도입했지만 지역에 따라 그 시점이 달랐다. 스페인은 1616년 그레고리력을 썼지만 영국은 1752년에야 도입한다. 1918년 그레고리력을 도입한 러시아의 ‘10월 혁명’(1917년)이 지금 기준으론 11월에 발생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역사 속의 시간 시간 속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인류가 시간을 동일하게 인식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다. 시간 인식에 차이를 보인 것은 시간 측정 작업이 그만큼 지난한 일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측정했다 싶으면 어느 순간 어긋나 있는 것을 보정하는 작업을 반복해왔다. 또 시간을 인식하는 것이 과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 것도 이유가 됐다. 종교를 비롯한 세계관의 문제가 보다 정확한 시간 인식을 가로막기도 했다.
시간 측정의 어려움은 기준이 되는 천체의 운행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오늘날 측정한 달의 주기는 29.5306일로, 태음력의 1년(12개월)은 354.3672일이다. 반면 태양력의 1년은 365.2422일이다. 둘 다 정수로 떨어지지 않고, 그 주기를 일치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4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도입한 율리우스력은 1년을 태양력 365.25일로 정하고, 4년 마다 366일의 윤년을 뒀다. 4년 마다 하루만 추가하면 된다는 점에서 편리해보였지만 ‘365.25와 365.2422’의 틈은 해가 거듭될수록 벌어졌다. 1년에 11분 24초로, 128년이면 하루가 되고 402년이면 사흘로 늘었다. 그레고리력이 도입된 1582년에는 10일을 보정해야 할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 사이 1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러한 문제를 아는 사람이 없었을까. 사실 율리우스력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학자가 이미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수정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종교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달력 만드는 일을 넘어서 시간을 계산하고 부활절을 계산하는 것은 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으로 대표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그레고리력을 도입한 것이 ‘고난 주간’을 제날짜로 돌려놓으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보다 범위를 좁히는 하루의 측정 역시 쉽지 않았다. 해시계, 물시계, 아스트롤라베(천문기구), 모래시계 등이 쓰였지만 정확성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가 “시계들이 서로 일치하기를 바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더 쉽겠다”고 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13세기에 등장한 기계시계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7세기 크리스티안 하위언스의 진자시계가 등장할 때쯤 하루 오차는 10초 정도로 줄었다. 그 전까지 대부분 시침 하나만으로 시간을 표시하다 분침이 널리 쓰이게 된 것도 정확성이 높아진 때문이다.
1930년대 하루 오차를 0.002초로 줄인 수정시계를 거쳐 2001년 선보인 광학시계는 오차가 300억년에 1초였다. 펨토초(1000조분의 1초)까지 측정 가능했다. 허블망원경이 측정한 우주 나이가 138억년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빅뱅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오차가 1초도 안 되는 시계를 개발한 것이다.
책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시간의 역사를 다룬 후 범위를 좁혀 조선의 사례를 살펴본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새 역법을 반포하는 관례’는 황제국에만 해당되는 것이어서 조선은 독자적인 역서를 편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북경과 한양의 위·경도 차이로 중국 역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현지화 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특히 일식이나 월식처럼 구식(救蝕·해가 먹히는 것을 구원하는 의식으로 임금이 해나 달을 향해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자숙하는 예를 행함)의 예를 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확한 시간 측정은 더 없이 중요했다. 이에 조선은 맞춤형 역서를 만들어 배포했지만 공식화하진 않았다. 재밌는 것은 중국도 독자적으로 역서를 간행하는 것을 알면서 묵인했다는 점이다. 지리적 차이를 어느 정도 감안한 때문이다.
중국이 마테오 리치, 아담 샬 등으로부터 서양 역법을 받아들여 새로운 역서를 편찬하자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애쓴 모습도 그려져 있다. 중국이 역서만 주고, 이해하고 활용할 지식은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책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서양 선교사를 직접 만나 관련 내용을 배우기도 한다. 그 결과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중국의 새로운 역서를 어느 정도 완벽하게 소화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이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자격루를 비롯해 조선의 시계 역사도 다루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에서 나름 독자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저자는 이같은 노력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서양 과학기술이 성인의 도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긴 했지만 그 이상 나아가진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순수과학이 유교적 자연관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였다”고 표현했다.
책은 근대적 시간체제로의 편입이 식민지와 포개지는 순간에 대해서도 짧게 다룬다. 이 중 1921년 6월 10일부터 시행된 ‘시(時)의 기념일’은 근대적 시간 체제로의 편입과 동시에 식민지배의 효율성을 높이는데 동원된 한반도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만주사변 이후인 1938년부터 ‘시의 기념일’ 행사에 총독부는 황거요배(일본 왕이 거처하는 곳을 향해 절함)를 하고, 1분 동안 황군의 무운장구를 위한 묵도를 하도록 지시했다.
시간의 역사에 대한 큰 흐름 속에 조선의 시간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앞부분과 뒷부분이 다소 튀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생소했던 조선의 시간관을 전체의 흐름 속에서 비교해볼 수 있다. 조선 관련 내용에선 생소한 용어나 한자어 등이 많아 ‘미주(尾注)’를 자주 펼치며 확인하게 된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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