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고통스런 발굴이 재배치하는 진실의 역사

2021. 1. 2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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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발굴, 웬디 C. 오티즈 지음, 조재경 옮김 카라칼, 320쪽, 1만6000원.
‘기억의 발굴’은 10대의 불행했던 과거를 마주하는 주인공의 회고록이다. 끔찍했던 시절의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선 먼저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마주해야 했다. 저자는 “나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진실은 아는 얼굴로, 아는 표정을 짓고, 아는 옷을 입은 채 약속 시간에 나타나는 친구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낯선 태도로, 모를 듯한 말투로, 혼란스러운 행색으로 우리 주변을 배회하는 이방인에 가깝다. 한눈에 알아차릴 수 없으므로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절망이 필요하다. 그런데 만남이 성사되기 어려운 데 반해 우리는 그것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사건을 제 손 안에 놓고 한눈에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은 한 사람의 고유한 고통을 쉽게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며 사건의 실체를 성급하게 결론짓도록 한다.

우선 들어야 할 순간에 일단 말하고 보는 것이다. 어렵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과 쉽게 진실을 넘겨짚는 사람. ‘미투’는 우리에게 반복해서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이냐고.

장혜영 의원이 당 대표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사건을 공론화했다. 우리 시대의 한계를 오롯이 담은 장 의원의 글은 오래도록 읽힐 중요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 그중 피해자다움에 대한 재인식을 언급하는 내용에 무거운 마음으로 공감했다. 모르지 않았지만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충격으로 다가오는 경험들이 있다. “사건 발생 당시부터 지금까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속으로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고, 토론회에 참석하고,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그의 글이 공론화한 것은 가해자의 행위만이 아니다. 그는 ‘피해자다움’이라는 잣대가 아무것도 측정할 수 없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장 의원 말처럼 드러나는 모습이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피해자는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다움을 근거로 진실을 파악하려는 태도는 가짜인 피해자상으로 진짜인 피해 사실을 배척하는 결과를 만든다. 한마디로 폭력이다.


웬디 C. 오티즈의 회고록 ‘기억의 발굴’은 누구에도 말하지 못했고 실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던 10대 시절의 ‘비밀’을 해석함으로써 그 시절 자신과 화해를 시도하는 책이다. 열세 살 소녀 오티즈는 스물여덟 살이었던 영어 교사 제프 아이버스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지속적인 성관계를 맺었다. 둘의 관계는 제프에 의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고 제프에게 이런 관계는 오티즈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오티즈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관계는 일방적 착취에 기인한 폭력이었다. 제프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불안정하고 약한 내면을 봉쇄한 뒤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한 교활한 욕망에 오티즈는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오티즈는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걸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주로 심리적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을 타깃으로 한다. 폭력이 진행 중임에도 관계의 본질을 알아차리기가 힘들고, 시간이 지나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책과 자책으로 귀결되곤 한다. 지난 시간의 행동들이 ‘피해자답지’ 않기 때문이다. 오티즈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피해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일상은 계속됐고 웃는 얼굴로 선생님과의 만남을 지속했다. 실제로 이 책을 읽은 어떤 독자들은 성폭행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10대 소녀가 20대 남자 교사와 나눈 로맨스 소설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오티즈의 말, 생각, 행동은 익숙한 ‘피해자상’에서 벗어나 있지만 누구도 그가 피해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판단을 내려놓고 오티즈의 말에 귀 기울이면 알 수 있다. 진실의 동사는 때로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다.

서른이 넘은 오티즈는 잿빛 잔해로 가득한 그 시절 일기장을 들춰 행간을 채워 나간다. 그리고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던 진실을 과거의 자신에게 알려준다. 그대로 묻혀서 화석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을 기억을 발굴해 냄으로써. 가슴속에 품고 있던 무덤을 해체함으로써. “만일 피해자인 저와 국회의원인 저를 분리해 영원히 피해 사실을 감추고 살아간다면, 저는 거꾸로 이 사건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이라고 말하는 장 의원 역시 기억의 발굴자일 것이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발굴 작업이 진실의 역사를 재배치한다. 갇혀 버린 많은 영혼에 해방의 열쇠를 준다.

지난주 서효인 시인이 소개한 책은 이은혜 편집자의 ‘읽는 직업’이었다. 편집자는 읽는 직업인 동시에 읽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읽기는 누가 뭐라 해도 진실의 도구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벼리고 벼린 언어로 누군가는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읽는 이에게 전달하기 위해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딘다. 장 의원은 “성폭력에 단호히 맞서고 성 평등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소명이라고 했다. 쉬운 거짓을 몰아내고 복잡한, 일그러진, 모순된 진실이 읽힐 수 있도록 더 많은 ‘읽을 것’을 발굴하는 것은 편집자의 소명일 것이다. 장 의원의 글을 읽고 또 읽는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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