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 선을 지키면 존중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1927년 납 첨가 유연휘발유 판매
해마다 5000명가량 중독으로 희생
“고급 휘발유를 꼭 써야 하나요?”
고급 자동차를 구매한 지인이 어느날 제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제 배경이 ‘화학’과 관련 있어 간혹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최근 출시되는 차량 엔진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연비를 높이기 위한 방식이 주류입니다. 기술적 완성도가 있음에도 소비자에게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지인은 옥탄가 높은 연료를 사용하라는 제조사의 경고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가솔린으로도 불리는 휘발유는 보통 두 종류의 탄화수소 화합물이 혼합된 액체 연료입니다. 두 물질은 화학명으로 헵테인(heptane)과 옥테인(octane)이고 탄소와 수소로만 구성된 순수한 물질이죠. 정유사가 말하는 옥탄가란 바로 옥테인 함유량을 뜻하는 겁니다. 이 함유량이 연료의 신분을 결정하는 거죠.
지인은 일반 휘발유를 사용할 경우 엔진 ‘노킹(knocking)’이 일어난다고 걱정하더군요. 정유사별 유종 차이가 있고 고급유를 제공하지 않는 주유소도 있으며 가격 차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인의 고민은 바로 연료의 적정한 선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고옥탄가’가 노킹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다수의 소비자는 ‘옥탄’을 연료 첨가제로 이해하고 있더군요. 사실 옥탄은 ‘옥테인’의 독일어식 발음입니다. 같은 물질을 두고 독일어와 영어의 발음이 다른 셈이죠. 어찌 보면 학계에서 이런 용어를 미처 정리하지 못한 부분도 있겠네요.
그런데 노킹 현상이라 하면 화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인물이 떠오릅니다. 후회할 일을 만드는 데 천부적 소질이 있는 인물이죠.
노킹은 엔진 실린더 내부로 분사된 연료가 어떤 원인으로 예정된 시점에서 벗어나 폭발하며 소리와 함께 4~7㎐의 진동을 일으키는 현상입니다. 마치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용어입니다.
20세기 초엽 자동차의 기술 수준은 지금과 달랐죠. 차량 제어를 주로 기화기에 의존하던 시절입니다. 한 번쯤 들어보셨을 용어인 ‘카뷰레터(Carburetor)’는 기화기이고, 온도나 환경·연료에 예민한 부품이죠. 게다가 당시 석유 정제 기술에서 높은 품질의 연료를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노킹 현상은 당연했고 차량 이용자에게 큰 고통이었을 겁니다.
1921년 미국 오하이오주 제너럴모터스(GM)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토머스 미즐리(1889~1944)는 화학을 산업적으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테트라에틸납이라는 화합물에 대해 연구하다 이 물질이 엔진의 노킹 현상을 현저하게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냅니다. 사실 납이라는 물질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 치약 튜브에도 납을 사용한 것처럼 당시는 소비재 대부분에 납을 사용하던 시절이죠.
결국 GM과 화학기업 듀폰, 그리고 스탠더드오일은 테트라에틸납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합작회사까지 만듭니다. 당시 주유소에서 ‘에틸(Ethyl)’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연료가 납이 들어간 휘발유였죠. 납에 대한 인식이 워낙 좋지 않아 연료 이름에서 납은 빼고 에틸이란 상표를 사용한 거죠.
납중독은 고대부터 인류사와 화학사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가볍게는 근육 경직, 심하면 뇌기능 장애로 시각이나 청각 신경을 잃게 하고 사망까지 이르게 합니다. 로마의 멸망, 그리고 위대한 음악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난폭한 행동과 청력 상실의 원인은 납중독이었죠.
휘발유에 납을 첨가해 만든 연료가 유연휘발유입니다. 여기서 연은 ‘납 연(鉛)’자입니다. 당시 원인 모를 숱한 희생자와 유연휘발유의 위해성을 연결한 사람이 클레어 패터슨(1922~1995)입니다. 패터슨은 20세기 중반 우라늄 동위원소의 반감기 측정으로 지구 나이를 계산하려 든 인물입니다.
그는 시료 대부분에서 고농도 납이 검출됐다는 사실에 시대별 지질 조사로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과학자로서 지켜야 할 선을 지킨 겁니다. 이후 미국에서 청정대기법이 만들어졌지만 유연휘발유 판매는 198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에틸 판매가 시작된 1927년부터 60여년 동안 해마다 5000명가량이 납중독으로 희생됐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3년 들어 유연휘발유가 완전히 퇴출당합니다. 현재는 모두 납이 없는 무연휘발유죠. 미즐리는 첨가된 연료의 배출 가스로 대기에 납 농도가 증가하리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분명 그에게도 과학자로서 적정선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죠.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선을 넘게 했을까요.
프레온가스 오존층 파괴
후대 인류 거대한 대가 치르게 돼
‘블랙 골드(석유)’로 성공의 단맛을 본 미즐리는 과학기술이 가져다준 부(富)만 믿고 또 다른 선도 넘게 됩니다. 이는 인류뿐 아니라 지구환경마저 파괴했죠. 바로 클로로플루오로탄소 화합물인 CFC를 만든 겁니다. 우리에게는 냉매 ‘프레온가스’로 알려진 물질입니다. 이 물질도 유연휘발유처럼 그 대가가 혹독했죠. 이산화탄소의 온실효과와 비교해 1만배나 강한 프레온가스는 자기 양의 3만배가 넘는 양의 오존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두 물질은 반세기 동안 대기에 뿌려졌습니다. 결국 후대 인류와 자연은 지금도 기나긴 대가를 치르고 있죠.
이처럼 과학은 환경 정의의 관점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물질의 발견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과 피해를 보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누군가는 정의로운 적정선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의심된다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됩니다. 거기에는 분명 탐욕이 자리 잡고 있죠.
이런 선들이 반드시 과학자만의 전유물은 아닐 겁니다. 우리도 삶의 여정에서 무수한 유혹의 선을 만나거나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자 택배와 배달도 덩달아 많아졌죠. 집 앞이 일회용 플라스틱 쓰레기로 넘쳐납니다. 소비의 적정선이 무너진 겁니다.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전에는 어땠을까요? 집단적 의식을 공유하면 위험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익도 손해도 공평해지면 죄의식이 덜하기 때문이죠. 나만 변한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끓는 솥 안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던 거죠. 지구에서 인간이 살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잘되리라는 생각일 겁니다. 이건 확신이 아닌 낙관으로 포장된 소망일 뿐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려 들지 않는 겁니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힐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내연기관 차 사라지고 전기차 대세로
전기차도 100% 친환경차 아냐
팬데믹은 물론 전 지구적 기후현상도 쉽게 요약되거나 일반화되지 않습니다. 다만 쌓여가는 쓰레기를 보며 뭔가 망가뜨리는 원심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불안감은 분명해집니다. 견디기 힘든 팬데믹에 경제적·정치적 혼돈마저 겹쳤습니다. 국가는 물론 개인의 평범한 삶마저 유지하기 힘든 시절이죠. 그래서인지 지구의 미래를 호소하는 문구 아래 덤덤한 얼굴만 보입니다. 어쩌면 이 무심함이 이 전쟁 같은 시절을 버티는 데 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적정선을 만들고 지켜내야 합니다. 더 나은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선의 배열이 필요하니까요.
이제 지인의 물음에 답해야 할 것 같군요. 옥테인 비율이 94% 이상인 고급 연료가 노킹 방지에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국내의 일반 휘발유도 90% 이상으로 높은 편입니다. 게다가 최근 차량은 센서와 자동제어장치가 발달해 연료 점화 시기를 제어하죠. 오히려 이른바 ‘가혹주행’이 엔진에 무리가 됩니다. 엔진 회전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주행, 제 시기에 엔진오일 교환하기만으로도 엔진 관리는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동수단 이용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중요한 선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 기후위기와 함께 등장한 전기차가 쉽게 떠오르죠. 분명 전기차는 온실가스 배출에 직접 기여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머잖은 미래에 내연기관이 사라질 테니 노킹 현상도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전기차 충전 전기는 무엇으로 만들까요? 저는 여기서 명확한 적정선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자동차를 덜 타는 것밖에….
한림대학교 나노융합스쿨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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