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동철 칼럼] 너무나 절망적인, 그럼에도

입력 2021. 1. 27.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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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성평등 강조한 정의당 대표의
소속 의원 성추행 사건 충격적이고 참담해

그릇된 성인식, 권력형 성범죄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여실히 보여줘
정의당 징계 절차 등 엄정하게 매듭지어

성범죄 처리 전범 만들고 환골탈태 계기 삼기를

김종철 정의당 전 대표의 성추행 사건은 충격이었다. 인권과 성평등을 주요 어젠다로 내세웠고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한다고 자부해 온 진보 정당의 대표가 같은 당 여성 의원을 성추행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으로 이어진 성폭력 사건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데 유력 정치인의 권력형 성범죄가 또 발생해 참담하다. 진보 진영이 주장해 온 도덕적 우월성은 이제 언급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곤두박질쳤다. 권력형 성폭력이 당사자와 주변에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러 사례가 보여줬는데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는 현실에 절망한다.

이번 사건은 누구라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 피해자인 장혜영 의원은 사건이 알려진 후 공개한 입장문에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누구라도 동료 시민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데 실패하는 순간,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적었다. 정확한 지적이다. 성폭력은 그런 짓을 할 ‘나쁜 사람’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고, 주위의 신망이 두텁고, 존경을 받아온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김 전 대표도 장 의원과 함께 성추행, 성폭력 근절을 외쳐 왔던 정치적 동지이자 장 의원이 마음 깊이 신뢰하던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나 신체 접촉, 성적 발언은 모두 성폭력이다. 성폭력은 상대를 동등한 인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데서 싹이 튼다. 상대를 성적 대상화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여기다 자제력을 잃는 순간 성폭력이 나타나게 된다. 성폭력 피해자인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성폭력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유권, 인권을 모두 침해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피해자는 큰 상처를 입고 평온했던 삶이 온통 뒤흔들리는 고통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뢰하던 사람이 가해자일 경우에는 상처가 더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정의당은 내부에서조차 ‘발전적 해체’ 주장이 나올 정도로 위기에 처했다. 당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싸늘하다. 진보 정당에 대한 불신도 커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의당이 이 사건을 엄정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표는 가해 사실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당의 결정에 앞서 대표직에서 사퇴하고 징계도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성희롱 및 성폭력 교육을 이수하겠다고도 했다. 당은 직장내 성희롱 처리 절차를 밟아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김 전 대표를 직위해제했으며 중앙당기위원회를 열어 김 전 대표를 징계하기로 했다. 박 전 시장 성폭력 사건이 불거진 후 더불어민주당과 서울시가 보여줬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흐름이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법정 다툼으로 몰고가고, 주변에서 2차 가해를 하는 바람에 피해자가 더 큰 고통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5일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인정하는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사건 공개 6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피해자는 관련자들의 비협조와 책임회피, 무수한 2차 피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이러니 피해자들이 움츠러들어 피해 신고를 꺼리게 되고, 이는 많은 성폭력 사건이 묻히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몰고올 파장이 두려웠을 텐데도 용기를 내 사건을 공론화함으로써 바람직한 해법의 문을 열어 준 장 의원에게 감사와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장 의원은 “문제를 제기하고 공개적인 책임을 묻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것이 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자, 제가 깊이 사랑하며 몸담고 있는 정의당과 우리 사회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고름을 말끔하게 짜내야 새살이 돋고 상처가 빨리 아무는 법이다. 정의당은 무관용의 원칙에 따라 이 사건을 끝까지 엄정하게 매듭짓고 당의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실망이 크겠지만 김 전 대표로 향해야 할 비난을 정의당에 퍼붓는 것은 무익해 보인다. 이는 장 의원의 용기 있는 문제제기에 대한 올바른 화답이 아니다. 장 의원이 상처를 극복하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응원한다.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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