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바이러스의 생존 전략

입력 2021. 1. 27.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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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1년을 살았다. 1년 전에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상황이 쉬 끝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됐다. 오히려 코로나와 함께 영원히 살지 모른다는 주장이 당연하게 들린다. 백신을 맞으면 해결될 거라는 믿음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된 나라에서도 바이러스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파력이 월등히 높은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이 그 이유라고 한다. 백신 접종 속도가 변이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따라가지 못하면 새로운 환자의 급증을 피하기 어렵고,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아마 그런 시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이러스 변이에 대해 말하면서 전문가들은 그것이 바이러스의 생존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바이러스에게 그런 본능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다고 할 수 없다. 적자만 생존하기 때문이다. 보호색을 띠든가 몸의 한 부분을 변형시키든가 다른 종의 습성을 이용하든가,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한다. 서식 환경에 맞게 자신을 맞추는 적응의 과정은 일종의 타협 성격을 띠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막에 서식하는 식물은 넓은 잎을 희생하고, 고산지대의 들꽃들은 강한 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키를 포기한다.

최근 발견된 바이러스 변이가 치명률을 낮추는 대신 전염률을 높이는 방법으로 이뤄진다는 보도는 꽤 흥미롭다. 되도록 많이, 되도록 빠른 시간에 번식하는 방법을 택하는 잡초들의 전략과 같다. 치명률을 포기하고 전염률을 택하기. 바이러스의 변이는 생명체들의 생존 비밀을 알려주는 것 같다.

지구라는 생태계의 한 종인 인간 역시 이 방향으로의 변이를 겪으며 생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넓어지고 빨라지고 확산되는 과정이 인간의 역사였다. 한쪽에 집중해 있던 권력이 분산되는 식으로 발전해온 민주화의 과정이나 소수만 향유하던 문화와 예술이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간 대중화의 과정, 그리고 숨겨지고 감춰져 있던 신비의 세계가 숨김없이 노출되고 폭로되는 세속화의 과정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민주화와 대중화와 세속화는 세상 변화에 맞서 인류가 선택해온, 이른바 전염률 우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적응과 진화의 과정에서 획득되는 좋은 것이 있지만 훼손되는 것도 있다. 가령 깊이를 도외시한 무작정의 확장이나 삶의 신비를 폐위한 세속성으로의 무한정한 질주는 가끔 두렵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그러나 실존에 선행하는 것은 생존이다.’ 사회학자 김홍중의 최근 저서 ‘은둔 기계’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그는 죽음 직전의 자크 데리다의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삶·생명은 생존이라고, 생존에의 몰두를 경멸하는 사상과 거리를 두라고 충고한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존이 위태롭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오면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포기해야 할 것이 생긴다. 치명률 대신 전염률을 택하는 것과 같은 타협은 그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겠지만 항상 최선인지는 알 수 없다. 시급한 일이 있을 때는 중요한 일보다 먼저 처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중요한 일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온전히 자연의 법칙, 즉 본능에 따른 선택을 해야 한다면 인간의 이름을 따로 구별해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다고 해도 버리면 안 되는 ‘치명적인’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생존만이 유일한 존재 조건인 바이러스와 인간은 다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요소를 포기할 때 인간은, 설령 생존에 성공했다고 해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생존을 삶·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름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승우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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