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정충묘의 비극

이현우 입력 2021. 1. 2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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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3번 국도를 타고 경기 광주시로 내려가다 보면 길가에서 '정충묘(精忠廟)'라 쓴 문화재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이 정충묘는 병자호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한국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전으로 알려진 1637년 쌍령전투에서 전사한 5명의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도저히 질 수 없었던 이 전투를 참패로 몰고 간 것은 조선왕조의 경직된 관료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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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 위치한 정충묘의 모습.[이미지출처=경기도 광주시 홈페이지]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서울에서 3번 국도를 타고 경기 광주시로 내려가다 보면 길가에서 ‘정충묘(精忠廟)’라 쓴 문화재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이 정충묘는 병자호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한국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전으로 알려진 1637년 쌍령전투에서 전사한 5명의 장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특히 당시 조선군은 청군보다 월등히 앞선 전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참패해 두고두고 치욕의 전투로 불리고 있다. 전투 당시 조선군은 보병 8000명에 당시 최신무기였던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고작 기병 300명과 보병 3000여명 정도였던 청군에 완전히 참패한다. 지휘관도 이순신 장군이 인정한 명장인 경상우병사 허완과 경상좌병사 민영 등 임진왜란에서 잔뼈가 굵은 노장들이었다.

도저히 질 수 없었던 이 전투를 참패로 몰고 간 것은 조선왕조의 경직된 관료주의였다. 군사 지휘권을 현장 경험이 많은 야전사령관이 아닌,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관료들이 휘두르면서 벌어진 참사였다.

쌍령전투 때 조선군의 지휘권은 문신 출신인 경상감사 심연에게 있었다. 각 도의 감사는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로 한양에서 임명돼 내려간 전형적 행정 관료였다. 그는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된 상태였던 국왕 인조와 조선 조정이 지체 없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허완과 민영에게 빨리 청군을 공격하라고 재촉했지만, 전쟁 경험이 많은 두 장수는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이에 심연은 자신의 비서관이었던 종사관 도경유에게 쌍령에 주둔한 조선군 진영에 가서 청군 공격을 명령하라고 지시를 내리며, 항명하는 장수는 죽여도 상관없다고 명했다. 이에 도경유가 쌍령에 도착해 공격 명령을 내리자 당시 최전선 지휘관인 비장 박충겸이 우병사의 명령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에 도경유는 심연의 명대로 박충겸을 그 자리에서 참수해버리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군은 할 수 없이 청군을 공격했지만,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되면서 사격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자 병사들이 제멋대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결국 청군에 타격도 주지 못한 채 순식간에 탄약만 소진됐고, 이 틈을 타 청나라 기병대가 조선군 진영으로 돌입하자 지휘부까지 전멸하는 참패로 이어졌다. 결국 이 전투 결과를 받아든 인조는 항전 의지를 잃고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현장 지휘관들의 의견이 철저히 무시되고 윗선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관료주의의 폐해는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란 전쟁을 겪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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