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 한 마리 안 잡히는데, 왜 홍어의 본고장일까
[이돈삼 기자]
▲ 영산포등대 앞에 마련된 황포돛배 선착장. 황포돛배는 옛 영산포의 영화를 그리며 영산강을 오가는 관광용 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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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이 품은 바다라고 '영산내해(榮山內海)'라 했다. 영산강이 바닷길과 통하던 시절의 얘기다. 그때 영산강은 자체로 바다였다. 그 바다를 통해 문물이 오가고, 다른 세계와 교류를 했다. 고려부터 조선시대엔 조창(漕倉)을 통해 물산이 한양으로 올라갔다. 일제강점기엔 나주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빼앗기는 수탈 창구였다.
그곳이 영산포다.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이다. 바닷길로 연결된 당시 영산포는 큰 포구였다. 영산포는 일제가 나주와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수탈해 가려고 목포, 군산과 함께 전략적으로 개발했다. 하루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었다. 자연스레 돈이 오가고 선창도 북적거렸다. 창고와 금융기관, 관공서, 요릿집이 즐비했다.
▲ 영산강변에 세워져 있는 영산포등대. 일제가 처음엔 수위 관측시설로 세웠다가 나중에 등을 달아 등대 역할까지 맡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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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나온 주민이 죽전골목의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다. 눈이 내린 지난 1월 13일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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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불을 밝힌 등대가 지금도 영산강변에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세워졌다. 처음엔 일제가 강물의 높낮이를 재는 수위측정소로 설치했다. 수탈용 배가 안전하게 드나들도록 하기 위해서다. 5년 뒤엔 여기에 등을 달아 등대로도 활용했다.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고, 배의 앞길까지 밝힌 영산포등대는 우리나라 연안에 있는 유일한 등대였다. 영산포 홍어의 거리 앞, 황포돛배 선착장에 있다. 황포돛배는 영산강을 따라 오가는 관광용 배다.
▲ 영산포 역사갤러리 앞 풍경. 역사갤러리는 나주시가 옛 조선식산은행 건물을 고쳐서 꾸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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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포 역사갤러리의 내부. 역사에서부터 건축물과 홍어 이야기까지 영산포와 관련된 이야기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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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역사갤러리는 당시 영산포를 체계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나주시가 옛 조선식산은행 건물을 고쳐 역사관으로 꾸몄다. 영산포의 역사에서부터 일본인 지주 주택, 식산은행 등 영산포의 건축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큰 배가 지날 때 들어 올리고, 평소 내려놓는 개폐식 목교가 영산강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목교를 오가는 사람들도 통행료를 내야 했다고 한다. 목교를 개인이 만들었다고.
영산포가 홍어의 본고장이 된 이유
▲ 홍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공용화장실. 왼편의 그림이 남자용, 오른편이 여자용 화장실을 가리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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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어식당이 줄지어 선 영산포 홍어의 거리. 눈이 내린 지난 1월 8일 풍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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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한 마리 잡히지 않는 영산포가 삭힌 홍어의 본고장이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흑산도 사람들이 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는 겨울엔 육지에서 주로 생활했는데, 그곳이 영산포라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고려 말에 왜구를 피해 섬을 비우는 공도 정책과 관련된다. 바다에서 홍어를 잡고 살던 흑산도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이주해 오는 동안 홍어가 변질됐다. 그것이 오늘날 삭힌 홍어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 손질을 거친 삭힌 홍어. 택배용으로 포장돼 소비자를 찾아가기 직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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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고기 수육과 만난 삭힌 홍어. 묵은김치와 어우러져 삼합을 완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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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힌 홍어는 특유의 냄새 탓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명확히 갈린다. 홍어는 바다에서 물의 압력을 이기려고 사람보다 100배 많은 요소를 몸 안에 지니고 산다. 이 요소가 숙성되면서 분해돼 암모니아를 발생시킨다. 이것을 사람이 먹으면 알칼리성으로 변해 살균 작용을 한단다. 우리의 장을 깨끗하게 해주는 홍어다.
홍어 음식은 삼합이 기본이었다. 요즘엔 정식 또는 코스 요리로도 맛볼 수 있다. 홍어 무침으로 시작해 삼합, 튀김, 전, 찜 그리고 홍어애국까지 고루 맛본다. 납작하게 썬 홍어를 무, 미나리와 함께 빨갛게 버무린 홍어회무침은 예부터 남도 잔칫집에서 빠지면 안 되는 음식이었다.
▲ 영산포 죽전골목. 일제강점기에 땔감을 팔러 온 주민들이 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운 골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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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포에 있는 일본인 지주 주택. 쿠로즈미 이타로가 지은 집으로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일본풍의 저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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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지주 주택도 역사 자원으로 가치가 있다. 당시 영산포에서 제일가는 지주였던 쿠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살던 집이다. 쿠로즈미는 논밭 33만 평을 소유했다. 조선가마니 주식회사 사장, 다시 수리조합장, 전남영농자 조합장을 맡고 있었다.
▲ 붉은 벽돌 건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 지금은 주변의 정원과 함께 찻집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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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넘은 역사를 지닌 영산포교회 전경. 눈이 내린 지난 1월 8일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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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문서고도 있다. 일제가 우리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려고 만든 회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다. 일제는 1909년 동척의 전라도 첫 사무소를 영산포에 열고, 농지를 빼앗기 시작한다.
영산포보다 목포가 더 번성하면서 동척이 목포로 옮겨가고, 문서고만 남겼다. 지금은 붉은 벽돌의 문서고를 중심으로 주변의 정원을 활용해 찻집 겸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다.
영산포에서 눈에 띄는 곳이 또 있다. 옛 영산포극장과 100년 넘은 영산포교회도 옛 모습 그대로다. '여인숙' 간판을 단 숙박업소도 아직껏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땔감을 팔러 온 인근 주민들이 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웠다는 죽전골목도 애틋하다.
▲ 영산포교회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 눈이 내린 지난 1월 8일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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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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