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마저 탄식케 한 '암행어사' 속 악의 세력

김종성 입력 2021. 1. 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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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김종성 기자]

 KBS2 <암행어서: 조선비밀수사단>의 한 장면
ⓒ KBS2
KBS2 사극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에 등장한 '악의 세력' 중 하나는 영의정 김병근(손병호 분)과 지방 수령이 결탁한 집단으로, 이들은 백성들을 노예처럼 동원해 비밀 금광을 개발하다가 어사 성이겸(김명수 분)에게 발각됐다. 이들 중에서 지방 수령만 체포되고, 몸통인 영의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세력은 지방 토호의 자제들과 현지 수령이 결탁한 집단으로 이들은 기생들을 불러 모아 양귀비를 함께 흡입하며 향응을 즐기는 한편, 지역 여성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했다. 이들이 어사의 응징을 받는 모습은 지난 19일 10회분에서 방영됐다.

사극에 좀더 자주 등장하는 악의 세력은 첫 번째 유형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총리급 대신이 '만인'뿐 아니라 '일인'마저 억누르며 국정을 농단하는 모습이 사극에 자주 나온다. 조선시대 사극에서는 그런 대신들이 흔히 영의정이나 좌의정 직함을 갖고 있다. 이들이 우의정 관직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총리급 신하가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일이 실제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대신들이 생각처럼 그렇게 많았던 것은 아니다. 신하들은 왕이 주는 녹봉으로 살았기 때문에 왕의 의중을 크게 거역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유형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항상 존재했던 토호

기득권층 지도자들은 굳이 정부 관직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국가에서 부여하는 지위 없이도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많이 존재한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그 시절에는 대지주나 유교 지도자들 중에 그런 이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서 중앙이 아닌 지방에 기반을 둔 사람들을 흔히 토호라고 불렀다. 국가권력이 전국 방방곡곡을 샅샅이 망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토호는 어느 시대나 항상 존재했다. 

국가권력과 토호권력 간의 균형이 상실될 경우, 피해를 보는 쪽은 일차적으로 백성들이었다. 그런 경우, 백성들은 이중적 지배 구조의 폐해에 노출되기 쉬웠다. 토호들이 너무 세져서 국법을 무시할 정도가 되면, 이들이 또 다른 '조세 수취자'가 되어 민중을 괴롭히곤 했다.
 
 KBS2 <암행어서: 조선비밀수사단>의 한 장면
ⓒ KBS2
 
드라마 <암행어사>의 시대적 배경인 19세기에는 토호들이 유난히 극성을 부렸다. 사색당파를 탕평정치로 억누르던 정조 임금이 1800년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다수당인 노론당 내부의 소수 가문들이 중앙 권력을 독과점하면서 그런 현상이 심화됐다. 중앙권력으로 진출하는 길이 좁아지자 지방에서 활로를 모색하는 세력이 많아짐에 따라 생겨난 결과다.

지방에서 소왕국을 구축한 토호들은 서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재산을 빼앗는 일이 많았다. 사채놀이를 하면서 사적으로 형벌권을 행사하는 일도 있었다. 개중에는 관청의 불법적인 조세 수취를 거들어주는 일도 있었다. 토호들이 독자적 방법으로 또는 중앙권력 대리인과 결탁해 서민들을 착취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토호들이 무서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는 서민 경제를 교란시키고 국가의 조세수취를 곤란케 만들었다. 토호들의 존재가 군주와 중앙정부에까지 악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래서 토호들은 민중뿐 아니라 왕실한테도 증오의 대상이었다.

왕권을 무시한 토호권력... 철종의 탄식

비변사(국가안전보장회의) 업무일지인 <비변사등록>의 철종 13년 8월 13일자(양력 1862년 9월 6일자) 기록에 따르면, 철종 임금은 "토호들이 함부로 독단하는 폐해를 금지하며 타이른 일이 그저 몇 번 정도가 아니었다"며 이들이 이향(吏鄕, 관청 서리+수령 자문 양반)과 결탁해 자행하는 불법을 개탄했다.

"대체로 이들이 이향과 결탁해 소민(小民, 하층민)들을 핍박하여 부자들은 가산을 탕진하고 빈자들은 고향을 떠난다. 곳곳에서 근심과 원망이 나와서 위로 하늘의 조화를 깨트리기에 충분하니, 이는 참으로 조정에서 항상 한탄하는 일이다."

왕권을 무시한 토호권력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부자들까지도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한 폐해가 하늘의 기운을 망가트릴 정도라고 철종은 탄식했다.

군주들은 독자적 권력을 무기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그런 토호들이 불편했다. 자기에게 녹을 받는 영의정이나 좌의정이 불법을 저지르는 일은 그 다음 문제였다. 드라마와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영의정·좌의정 등으로 인한 폐해보다 지방 토호들로 인한 폐해가 훨씬 심각했다.

토호들의 권력이 커지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후삼국시대 개막이다.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는 토호에서 출발한 호족들을 기반으로 건국된 나라들이다. 궁예와 견훤의 등장은 남북국시대(발해·신라)의 모순을 시정하는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토호 권력이 비대해지다 보면 국가 수립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런 토호들은 어느 시대나 항상 존재했다. 대한민국시대에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다. 2010년에 <황해문화> 제69호에 실린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기고문 '지방의 권력구조와 토호세력'은 우리 시대의 토호들의 존재 형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개 돈 많은 재력가가 많지만, 문화예술계나 체육계·언론계·여성계 등 모든 분야에도 그런 토호들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대기업은 그 자체가 막강한 권력이자 압력단체라는 점에서 논외로 하더라도, 그 밖의 재력가나 기업인들은 상공회의소나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 지역 경제인단체의 회장직을 맡기 위해 기를 쓴다. 또한 자유총연맹과 새마을·바르게살기 등 전통적인 관변단체의 지회 또는 지부장도 대부분 기업체 사장들이다. 그런 자리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게 정치·행정 권력과 만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토호들이 경제력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무기로 경제인 단체나 관변단체 간부직을 차지하고 이를 발판으로 정치·행정 권력에 접근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뛰는 어사' 위에 '나는 토호'
 
 KBS2 <암행어서: 조선비밀수사단>의 한 장면
ⓒ KBS2
 
이 같은 토호들의 발호는 과거·현재·미래 어느 때나 항상 중요한 사회현상이다. 이들의 발호는 대중이 국가권력과 토호의 이중 지배에 노출되도록 만들 수 있다. 또 대중이 국가권력과 싸워서 쟁취한 민주주의를 상당부분 무의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대중은 국가권력과의 관계에는 익숙하지만 토호들과의 관계는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토호들의 급성장에 대중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드라마 <암행어사>의 시대인 19세기 전반의 조선 민중들도 토호의 급성장이라는 생소한 상황에 직면했다. 세도가문들의 중앙권력 독과점으로 인해 지방으로 밀려난 세력들이 전국 곳곳에 소왕국을 건설하고 이를 발판으로 서민층을 착취하는 일이 횡행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암행어사 제도가 특히 긴요했다. 자기 분신들을 만들어내는 홍길동처럼 암행어사들도 자기 분신을 만들어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토호들이 곳곳에서 극성을 부렸다.

하지만, 토호들이 한 수 위였다. 그들은 더 많은 자기 분신들을 만들어내며 곳곳에서 이익 독과점에 열중했고 이것이 조선왕조를 약체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처럼, 19세기 전반은 '뛰는 어사' 위에 '나는 토호'가 판치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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