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 통합과 장악, 모두를 포함한 '저수지 리더십'

입력 2021. 1. 2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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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조직에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조직원으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한곳을 바라보게 하는 갈등의 봉합과 통합의 리더십 또한 필요하다. 어떤 것이 먼저인가 하는 순서보다는 두 가지가 동시 시전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강력한 리더십, 통합의 리더십,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즉, 본질은 같지만 외형만 다르다. 그리고 그 본질은 한마디로 ‘저수지’다.

▶직장에서 스스로 빛나는 발광체는 없다

오랜만에 H그룹의 박 전무를 만났다. 그는 실력과 인품을 갖춘 임원으로 그룹 오너 회장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는 이른바 H그룹의 실세 중 한 명이다. 그에게 직설적인 질문을 해 보았다. “직장 생활, 어떻게 하면 전무님처럼 출세할 수 있나요?” 그러자 박 전무는 ‘허허’ 웃으며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박 전무는 그룹 공채로 입사했지만 부장까지는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승진도 선두 그룹이 아닌 2, 3그룹으로 항상 2년 혹은 3년 늦게 승진했고, 부서도 핵심 부서가 아닌 변방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박 전무는 성실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고 부하 직원들과도 소통의 리더십으로 관계가 좋았다. 그의 상관은 김 이사였다. 김 이사는 능력은 있어 그룹의 선두 주자로 이사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그는 출세욕이 너무 강해 부하 직원들을 쥐어짜듯 일을 시켰고 상사에게도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는 성공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도 현재 모습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항상 위에만 쳐다보면서 ‘세상이 나 같은 인재를 몰라 준다’고 한탄하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지금의 오너 회장은 사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그룹의 핵심 부서뿐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부서에도 관심을 갖고 식사를 하거나 미팅을 하는 등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김 이사의 부서도 사장과 점심 미팅을 갖게 되었다. 김 이사는 박 전무, 당시 박 부장과 동행했다. 약 2시간의 점심 식사에서 사장은 김 이사의 자기 자랑과 과시보다는 논리와 경험에서 우러나는 현장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달하는 박 부장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한 번 더 식사 자리가 있었다. 두 번의 식사 자리가 끝난 뒤 김 이사는 박 부장을 불렀다.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박 부장, 미안하지만 다음 번에 사장님과 미팅이 있거나 식사 자리가 있을 때 박 부장은 빠졌으면 좋겠어. 솔직히 얘기해서 사장님이 나보다 박 부장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직설적이라 내 감정을 숨기지 못하겠어. 나보다 박 부장에게 관심을 갖는 사장님의 모습이 불편해. 그러니 다음 번에는 나 혼자 가겠어.”

평소 독선과 이기적인 리더십을 보여 준 김 이사이기에 박 부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 이사의 속 좁은 심보를 딱하게 여겼다. 그리고 세 번째 미팅이 잡혔다. 이번에도 김 이사는 혼자 사장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바빴다. 사장은 박 부장의 부재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사장 역시 김 이사의 성품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미팅은 사장이 박 부장을 보기 위해 준비한 자리. 정작 주인공은 빠지고 조연 배우가 2시간 동안 관객이 전혀 흥미 없어 하는 연기를 펼친 셈이다. 얼마 후 사장은 박 부장을 따로 불렀다. 그렇게 박 부장은 오너 회장과 인연을 맺으면서 실력을 증명할 수 있었다.

사장은 박 부장에게 특별 프로젝트 진행을 맡겼다. 부서 일과는 상관없이 사장이 2세로서 성과를 내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프로젝트였다. 어떤 기업도 2세가 단순히 회장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회장 자리를 물려받지는 않는다. 그럴듯한 명분을 쌓아야 한다. 그것은 학벌일 수도 있고, 평사원부터 근무하며 현장을 익히는 모습일 수도 있고, 임원급이 되어 프로젝트를 맡아 일정 성과를 내는 모습일 수도 있다. 박 부장은 조용히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이후 사장은 박 부장을 핵심 부서로 이동시키고 자신의 측근으로 중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김 이사는 도태되어 계열사를 전전하다 퇴직했고, 사장이 회장으로 취임하자 박 부장은 상무, 전무로 승진했다.

“뜻밖의 기회에 회장님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한 기회였지만 당시 나는 욕심이 없었어요.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고 말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아마도 그런 모습에서 회장님이 저를 담백한 직원으로 평가하고 잘 보신 것 같아요. 김 이사에게도 내가 배운 것이 있어요. 조직에서 그 어떤 조직원도 스스로 발광체가 될 수는 없어요. 다 조직과 선배, 후배들의 빛을 모아야 큰 빛을 내는 것이지요.”(박 전무)

만약 김 이사가 박 부장의 능력과 인품을 오히려 칭찬하고 오너 회장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다면 이 두 사람의 직장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박 부장뿐 아니라 김 이사 역시 오너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능력 있는 참모를 거느릴 수 있는 것 역시 능력 있는 리더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 전무의 예에서 우리는 진정한 리더십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능력과 지휘 솜씨만이 아닌 다양성을 한데 모으는 능력, 여러 가지 색의 물감으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넓은 시야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리더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항우와 맥아더같이 천재급 능력을 갖추고 선두에서 조직을 이끄는 ‘원맨쇼형’ 리더도 있고, 아이젠하워나 유방처럼 능력자는 아니지만 귀와 마음을 열고 조직을 순탄하게 이끄는 ‘소통형’ 리더도 있다. 이 중 어떤 유형의 리더가 더 필요하고 우월한가에 대한 판단 기준은 고정형이 아니다. 조직의 형태, 조직 구성원의 성향, 조직의 지향점 등등에 의해 리더의 모습은 가변형이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의 직장 생활에서 대개의 리더들은 조직, 엄밀하게 말해 조직원에게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리더십 성향에 조직원이 적응하는 쪽을 더 선호한다. 이런 리더에게 잘잘못을 따지거나 혹은 전례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역사 이래 제국, 왕조의 흥망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 온전히 리더십에 의한 것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조직을 수렁에서 빼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직원이 한마음으로 한곳을 바라보게 하는 갈등의 봉합과 통합의 리더십 또한 필요하다. 어떤 것이 먼저인가보다는 두 가지가 동시에 시전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강력한 리더십, 통합의 리더십,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즉, 본질은 같지만 외형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한마디로 ‘저수지’다. 이는 용광로와 같다. 서로 다른 지향점, 목표, 불화, 갈등 등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들을 한곳에 담아내고 조직의 발전과 조직원의 만족 충족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마술을 부리는 큰 그릇인 것이다.

저수지에는 수많은 물줄기가 모여든다. 작은 천부터, 강처럼 큰 물줄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있고 때로는 더러운 오물과 쓰레기도 모여든다. 이것들은 한데 모여 거대한 물 저장고를 형성하고 그것은 가뭄과 홍수 등의 위기 상황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그 위기에서 우리는 저수지의 물을 비, 개천, 오물 등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다 저수지의 물인 것이다. 대개 사람을 평가할 때 ‘통이 크다’는 말을 종종 한다. 직장 생활에서, 특히 리더에게 이 말은 매사 화통하다거나 회식을 할 때 거침없이 돈을 쓰는 사람을 일컫지 않는다. 자신에게 당장 이익이 되는 소리든 귀와 마음을 괴롭히는 쓴소리든 다 담아낼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커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진정한 큰 통’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저수지 리더십’을 보여 준 인물이 있다. 바로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이다. 왕건은 여러 세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 즉 통합의 기술자였다. 그는 통합을 위해 때로는 칼을, 때로는 결혼이나 포용력을, 또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왕건의 가장 큰 통합 기술은 때를 기다리는 ‘순리’였다. 절대 무리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목표를 향해 나가는 순간만큼은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선두에서 조직을 이끌었다. 이렇게 강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담아내는 저수지 같은 리더십으로 강력한 경쟁자인 궁예와 견훤을 물리치고 후삼국 50년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었다.

▶배려와 소통의 바탕은 신뢰여야 한다

676년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내고 통일 왕국을 열었다. 그리고 2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반도의 첫 통일 왕국 신라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부정부패가 쌓이고 골품 제도의 닫힌 리더십으로 신라는 왕족과 귀족만의 나라가 되었다.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 닿았고 호족들은 각자도생을 시작했다. 80여 개 호족들은 경주에서 내려오는 왕명을 무시했고 각자 힘으로 지역을 지배했다. 이 중 백제의 부활을 꿈꾸며 전라도와 충청도를 터전 삼은 견훤의 후백제, 청주와 철원 지역 호족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경기, 충청, 황해, 강원도를 기반으로 한 궁예의 태봉으로 압축되었다.

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송악 일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호족이었다. 당시 지방 호족들은 거대 세력으로 등장한 견훤과 궁예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생존이었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궁예를 선택했다. 궁예로서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 벽란도를 끼고 있는 송악이 절대 필요했다. 이를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공짜로 얻은 궁예는 20세의 왕건에게 태수직을 하사할 정도로 왕건을 우대했다. 궁예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이는 왕건 등 송악 호족의 도움을 받아 중부 지역의 패자가 되기 위한 포석이었다. 왕건은 충실하게 궁예를 도왔고 특히 수군을 이용해 후백제 후방을 공격했다. 왕건의 움직임은 견훤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궁예와 전투도 힘든데 왕건이 후방 나주 지역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확장해 견훤의 뒤통수에 칼을 대는 형국이었다. 왕건은 나주 지역 백성의 구휼에도 소홀치 않았다. 엄정한 군기로 백성들을 약탈하지 않았고 진심으로 대해 나주 지역 호족과 백성들은 왕건의 지배에 전혀 반감을 갖지 않았다.

왕건은 공을 세우며 궁예 뒤를 이어 태봉의 2인자 시중에 올랐다. 물론 궁예는 왕건을 신임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청주 지역 1000여 가구도 함께 이주시켰다. 이는 송악 호족과 청주 호족 간의 세력 다툼에서 궁예가 청주 호족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이후 궁예는 잔인성을 드러냈다.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고 세상 만물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며 관심법으로 피바람을 일으켰다. 왕건은 자신을 불신하는 궁예에게 불안을 느꼈다. 왕건은 시중 자리를 내놓고 변방으로 가겠다고 궁예에게 청하며 궁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궁예의 불신과 잔인성은 극에 달했다. 궁예는 왕비가 왕건과 간통했다고 몰아세우고 왕자 두 명을 더러운 피라며 죽이는 등 하루에도 수십 명씩 측근을 처단했다. 백성의 원성이 높아 지자 홍유, 신숭겸, 복지겸 등은 왕건에게 궁예를 치자며 재촉했다. 고심하던 왕건은 철원으로 군사를 몰았고 궁예는 변복해 도망가다 백성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이때가 918년, 왕건의 나이 43세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왕건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여전히 견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버티고 있었고 비록 허울뿐이지만 천년 역사의 신라 역시 아직은 백성들 마음속에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왕건에게 가장 큰 고민은 고려를 이루고 있는 수십 개 연합 세력의 존재였다.

반란도 끊이지 않았다. 궁예에게 충성스런 청주 출신 호족들이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마다 왕건은 강경과 포용의 두 가지 리더십으로 호족 세력을 정리해 나갔다.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여 노동력과 군사력을 충당했다.

신라와는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배척하고 송나라와는 친선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동시에 두 명의 친구도, 두 명의 적도 만들지 않아야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있다는 왕건의 전략이었다.

견훤은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겁탈했으며 백성들을 핍박했다. 그리고 김부를 경순왕으로 내세웠다.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견훤의 작전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바로 공산성 전투다. 이때 위기에 빠진 왕건을 대신해 신숭겸이 왕건의 옷과 백마를 타고 후백제군의 화살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틈에 겨우 도망갈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을 잃었다. 왕건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왕건을 위해 목숨을 건 부하들의 존재는 왕건의 리더십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부하들이 목숨을 던져 보호하고 싶을 정도로 진정한 충성심을 유발하는 감동의 리더십 덕분에 왕건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왕건은 모든 정책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다양한 의견을 경청했고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안을 선택했다. 그는 그 목표가 어렵고 힘들어도 최전선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부하들을 존중하는 겸손 리더십, 그리고 그 자신도 예외가 되지 않는 실천의 리더십이다.

▶다른 것을 내야 하는 양손 가위바위보

935년, 견훤이 왕건에게 귀순했다. 견훤이 아들 넷 중 막내를 후계자로 정하자 장남 신검이 둘째, 셋째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갇혀 있다 겨우 도망친 견훤은 왕건을 찾았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로 대접하고 식읍을 내리며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신검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통일의 마지막에 다가섰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도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938년 왕건에게 투항하면서 왕건은 통일 왕조 고려의 문을 열었다.

통일 왕국을 건설했지만 왕건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했다. 그중 왕건의 최대 과제는 이해관계, 출신, 나라 등이 모두 다른 세력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왕건은 서두르지 않고 포용력과 인내심으로 그들을 하나씩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어 나갔다. 왕건은 29개의 호족 세력과 혼인을 통해 한 가족이 됨으로써 그들을 포섭했고, 귀순 호족을 감싸 안으며 그들의 지위와 부를 그대로 인정했다. 이는 무력을 동원한 피의 통일보다는 배려와 소통을 통한 통일이 고려를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는 왕건의 신념이었다. 또 왕건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세력의 인재들을 편견 없이 고르게 받아들였다.

왕건의 통일 고려의 기틀을 만들어 가는 정책과 통치의 바탕에는 포용과 배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신뢰가 기본이었다. 사실 궁예나 견훤은 왕건보다 뛰어난 능력자였다. 정치적으로는 궁예가 왕건보다 앞섰고, 군사 능력은 견훤이 왕건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럼에도 왕건이 통일 고려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은 견훤과 궁예가 갖추지 못한, 즉 신뢰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궁예는 사람을 믿지 않아 부하와 참모들을 죽여 스스로 고립되었다. 또 궁예는 신라를 품에 안을 생각보다는 없애야 할 타도 대상으로 여겼고, 이는 견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애왕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민심의 흐름에 역류했다. 하지만 왕건은 힘이 있든 약하든, 가난하든 부자든, 귀족이든 백성이든 하나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왕건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내세우지 않았다. 궁예를 끝까지 주군으로 모시려 했고, 견훤에게 많은 패배를 당했지만 귀순해 오자 예로서 그를 맞았다. 결코 민심을 역류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또한 왕건은 힘과 지략에서 앞서는 궁예와 견훤을 앞지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실력을 쌓으면서 때를 기다렸다. 왕건이 세력을 키우고 어질고 배려심 많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동안 궁예는 불신의 늪에 빠졌고 견훤은 포악한 군주가 된 것이다.

직장은 계급 사회다. 리더와 참모 조직이 있다. 리더는 합리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향해 조직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독불장군처럼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절대 아니다. 권한을 위임하고 그 위임된 권한이 조직 세포까지 전달되어 하나의 목표로 향하려면 당연히 리더에게는 유능한 참모 조직이 있어야 한다. 참모 조직의 능력을 자발적이자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고 능력이다. 이런 면에서 왕건은 모든 물을 담아내는 큰 저수지 같은 리더십으로 능력 있는 참모 조직을 거느릴 수 있었다.

왕건은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내분을 일으킬 수 있는 자기 사람 심기나 피의 숙청을 단행하지 않았다. 궁예가 만든 정책과 조직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고려의 틀을 잡아 나가는 전략을 선택했다. 견훤이라는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과 정책을 바꾸면서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을 삼간 것이다. 또한 왕건은 잘할 수 있는 것만 실행에 옮겼다. 그는 육상 전투에 약한 대신 수군은 강력했다. 왕건은 견훤의 기병 부대와 정면 승부를 결행하는 무모함은 피하고 대신 수군의 힘으로 견훤의 후방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견훤은 왕건의 수군에 대항하기 위해 수군을 증대하느라 힘을 허비하는 전략적 실수를 한 것이다.

현대의 직장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는 위험과 실패에 대한 예측과 그에 따른 B플랜 전략이 수반되어야 한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무모한 짓은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리더의 모험적 판단에 의해 조직이 움직이는 것은 리더에게도 조직에게도 위험하다. 그 순간에는 마치 조직이 능동적으로, 활동성 있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오류나 난관에 봉착했을 때 아무런 대책을 마련치 못하고 침몰하기 때문이다.

큰 저수지처럼 리더십의 큰 통을 마련해 보자. 그 안에서 영어를 잘하는 김 사원도, PT를 잘하는 박 사원도, 일머리는 좀 모자라지만 부서 화합에 큰 도움을 주는 비타민 같은 최 사원도 있다면 그 리더에게는 다른 이보다 선택지가 많다. 양손 가위바위보를 할 때 양손은 분명 다른 것을 내야 승산이 있다. 가위와 주먹을, 혹은 가위와 보를. 저수지 리더십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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