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21세기 '항일정부'의 책무
심상히 넘겼는데 심상치 않은 사진이라고 했다. 14일 청와대가 언론에 제공한, 문재인 대통령이 이임하는 도미타 고지 주한 일본대사와 나란히 선 모습(사진) 말이다. 국가안보실 제1차장 출신의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이 “저렇게 크게 사진을 내준 적이 없었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 우리 대통령이 이임하는 일본대사를 만났다는 기사는 20세기에나, 그것도 텍스트로 검색된다. 1990년 3월 ‘노태우 대통령이 야나이 신이치(梁井新一) 대사의 이임 인사를 받고 수교훈장 광화장을 줬다’ 정도다.
이번엔 문 대통령의 육성도 공개했다.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동북아와 세계 평화 번영을 위해 함께 가야 할 가장 중요한 파트너다.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조기에 복원해 나갈 필요가 있다.”
오랜 관행을 깬 건 청와대의 의도였을 것이다. 조 의원은 “일본 정부에 계속 보내는 러브콜”이라고 해석했다. 그럼직하다. 문 대통령의 18일 신년기자회견 발언도 같은 궤였다. 서울중앙지법이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제관습법상 국가면제(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하지 않고 원고 승소 판결을 한 걸 두고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법원을 비판했다(반발한 일본 정부를 향해서가 아니다). 현 정부가 형해화한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두고도 “한국 정부는 그 합의가 양국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했다.
강창일 주일대사가 일본 땅에 발을 내딛곤 “천황폐하”라고 했고, 청와대 내에서 일본을 향해 강성 목소리(적대국에 비유한 적이 있다)를 내던 김현종 안보실 2차장이 공교롭게 최근 물러났다.
현기증 날 정도의 표변이다. 박근혜 정부가 대법원에 징용판결에 대한 우려를 전한 걸 두고 ‘재판거래’로 몰아붙였고, 김명수 대법원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이래 유지되던 법률적 약속을 번복한 걸 두고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했던가. 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시도까지 치닫던 대치 국면에서 문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고, 청와대 민정수석이 죽창가를 거론했으며, 총선은 ‘한·일전’으로 치렀더랬다. 비판적 목소리는 ‘친일파’ ‘토착왜구’로 몰렸다.
이에 비해 정작 약속한 “현실적으로 최선인 방법”은 내놓지 않았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됐고, 이용수 할머니의 고발에도 건재하다는 게 대안적 현실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고노 담화(1993년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를 검증한다며 온갖 폄훼를 하다가 결국 “계승하겠다”고 한 아베 정부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에 주권면제까지 더해져 “터널 끝에 빛이 안 보인다”(전직 외교관)는 지경까지 갔다.
이러던 차에 말이 달라졌다.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절감해서라거나, 한·미·일 안보협력을 중시하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출범 때문에 또는 도쿄 올림픽에서 김정은과의 이벤트를 위해서란 해석이 나오는데 그 어느 것이든 무방하다. 진정 행동으로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대내적 노력까지 포함해서다.
문재인 정부는 특히나 국민감정을 동원, 반일 드라이브의 연료로 삼았다. 이제는 반일만으론 왜 애국일 수 없는지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항일 정부’로 각인돼 있으니 더 수월할 것이다. 툭하면 100년 전으로 퇴행하는 180여 석의 범여권도 설득 대상이다. 사법부 결정을 우회하는 해법은 어쩌면 입법부의 몫일 수 있어서다.
기연미연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2017년 후보 시절의 문 대통령의 말을 건넨다.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어쨌든 지속적으로 일본에 요구해야 될 내용이다. 다만 그것을 한·일 관계의 전제로 삼으면 안 된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가 참담하게 실패한 것이 외교 자체로 외교를 한 게 아니라 외교를 순전히 국내 정치용으로 한 거다. (중략) 그런데 외교는 그렇게 가면 금방 파탄나게 돼 있다.”(『운명에서 희망으로』)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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