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명예훼손
누구나 명예를 가질 수 있게 된 건 20세기 이후다. 중세 시대의 평민은 명예(honor)를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었다. 귀족과 성직자가 명예를 독점했다. 특정한 신분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명예를 이해한 것이다.
중세의 명예는 통치수단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명예는 권위와 동등한 것으로 해석됐다.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고유한 그 무엇이 바로 명예였다. 이런 이유로 귀족에게 명예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것이었다.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은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빈번히 쓰였다. 선동적·신성모독적 명예훼손이 대표 사례다. (‘명예훼손법의 기초이론에 관한 연구’, 김범진)
사람이면 누구나 명예를 가질 수 있게 된 건 보편적 인권이 인정된 후다. 명예를 보편적인 권리로써 인정하게 된 것이다.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가 죄가 된 건 이런 연유에서다. 중세의 명예가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명예 그 자체였다면 현대적 명예는 평판(reputation)으로 정의된다. 명예훼손법이 정의하는 명예는 존엄으로서의 평판(reputation as dignity), 명예로서의 평판(reputation as honor), 재산권으로서의 평판(reputation as property) 세 가지다.
명예훼손에 따른 명예권 침해도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다. 발언을 들었을 때의 불쾌감, 공표에 따른 평판 저하, 평판 저하에 따른 재산적 손해다. 국내법은 불쾌감과 같은 감정적 침해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명예를 쉽게 정의할 수 없다 보니 명예훼손죄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1항) 헌법소원 심리를 진행하고 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 22일 검찰의 노무현재단 은행 계좌 열람 의혹과 관련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이에 한동훈 검사장은 “이미 발생한 피해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검토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전형적인 명예훼손 사건이다. 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 이사장은 의혹 제기 근거를 공개하진 않았다. 이번 사건이 단순한 정치적 의혹 제기 수준에서 마무리가 된다면 사회적 실익은 전무할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걸러내기 힘들다는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세상이다. 근거 없는 명예훼손을 얼마나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논의가 이어지길 희망한다.
강기헌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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