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발들이 묻습니다, 당신 삶은 어떠냐고

김희정 2021. 1. 23. 17: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예순 넘어 첫 개인전 치른 강혁 작가

[김희정 기자]

우리는 매일 삶의 시계에 맞춰 어딘지 모를 각자의 목표를 향해 신발끈을 고쳐 매고 나아간다. 같은 시간 같은 상황이지만 그들의 신발을 통해 나는 그들의 삶을 상상해본다. '저이는 하이힐을 신었지만 뒷굽이 닳은 걸 보니 많이 돌아다니는 일을 하겠구나', '저이는 말쑥한 정장차림인데 구두에 흙이 많이 묻었네.' 위치상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가장 그 사람의 삶과 닮은 게 바로 신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강혁 작가의 '작가 노트' 중에서

신발이 말을 걸었다. "내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라고 말했다. 실물도 아닌, 보도자료로 보내온 이메일의 사진 속 신발 작품이었다. 그 말의 여운이 퍽 길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그러자 신발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작품을 다시 찬찬히 봤다. 신발은 예상치 못한 곳 여기 저기에 박혀 있었다. 홀로, 혹은 둘이, 또 여럿이 모여 있었다. 한옥의 창틀 위, 커다랗고 답답한 벽 속, 낡고 녹슨 갑판 어디쯤, 촘촘하게 얽힌 그물망 위와 흙탕물 등. 그런데도 신발은 작가에게 소중하고 귀하게 대접받고 있는 듯했다. 

작가의 이력 또한 독특했다. 1984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졸업, 1985년 mbc(문화방송) 보도국 입사, 2018년 MBC 뉴스그래픽 국장으로 정년퇴직, 민중미술 동인 '지평전' 등 다수 회화 그룹전 참여, 2020년 12월 2일~12월 14일 첫 개인전.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에서 작업 중.

작가를 만난 날은 2020년 12월, 어느 추운 주말이었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인사아트센터를 찾았다. 강혁(64) 작가의 신발오브제(설치미술) 작품 전시회, '행행본처(行行本處), 삶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전시회장은 방역수칙과 거리두기를 하며 진행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못다한 이야기는 해를 넘기고 이어져 16~17일 전화로도 인터뷰했다. 비록 그의 첫 개인전은 끝났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늦더라도 그와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다. 아래는 작가와의 일문일답.

인간의 삶과 닮은 신발
 
 강혁 작가는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에서 오래된 교회를 작업실로 개조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강혁 작가
ⓒ 김희정
 
- '신발'이라는 소재를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셨는지요?
"저는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퇴근을 했어요. 작업실이 동인천에 있을 땐 여의도로, 작업실을 파주로 옮긴 후에는 마침 회사도 상암동으로 이사를 해서 역시 전철을 이용했습니다. 하루는 전철에서 매일 스치듯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신발을 유심히 봤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과 일치하는 부분이 느껴지더군요.

제가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그런 이유였는지 인간의 삶과 신발이 닮았다는 생각 그리고 다양한 상상이 교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간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기사였는데요, 문득 신발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신발은 어느 곳에선 절규하고, 아비규환 상황에서 아우성치는 것 같습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정열적으로 오르거나 물장구치던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고요. 작품마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보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정교하고 세련된 작품에서 현대인의 애환도 느껴지는데요,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으셨는지요?
"잘 보셨습니다. 저는 예전에 주로 어딘가 어눌하고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작품에 담았어요. 역설적인 것은 그 사람들 속에 늘 희망을 그렸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사람한테 큰 희망을 봅니다. 그것은 제 작품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전시회 작품 또한 헌 신발에 녹슨 것과 흰색을 덧입혀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삶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물질의 풍요 속에 살지만 끝없이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 등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부조화와 조화, 극명한 대비의 어울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이지요. 작품에 인천광역시 동인천동의 동네 풍경과 정서도 들어있습니다. 동인천동은 제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인데요, 낡고 오래된 집, 녹슬고 퇴락했지만 정겨운 옛 골목, 월미도를 바라보는 잿빛도시 등. 그 동네는 지금도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강혁 작가의 신발 작품은 고색창연한 한옥의 창틀 여기저기에도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신의 신발, 곧 삶의 흔적은 어디에 있는 지 묻고 있는 듯 하다. 114×157cm 사진제공/ 강혁 작가
ⓒ 김희정
  
- 헌 신발이 입체감 있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되기까지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많이 했어요. 헌 신발에 조각 기법을 사용했더니 신발의 물성이 헝겊과 고무라 시간이 지나면서 삭아버리더군요. 그래도 실험과 연구를 거듭했어요. 미술 관련 전문가와 교수의 도움도 받았고요. 그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번 작품은 도자기 제작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제작했습니다. 흙을 빚어 유약을 바르고 장작가마에 넣으면 불의 변화에 따라 도자기의 형태와 색깔이 달라지지요. 그러듯이 신발을 젯소에 넣고 말린 후 철가루를 칠하고 열두 시간이 지나면 부식액을 바르고 야외에서 말립니다. 그러면 이렇게 형태가 살아있는 작품이 나와요. 흥미로운 것은 그날 햇빛과 습도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속도도 중요합니다."

- 33년 동안 방송일을 하셨고 은퇴 후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은퇴 후 준비를 철저히 하신 듯 합니다.
"은퇴하신 직장 선배들의 다양한 삶을 보면서 제2의 제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마흔 넘어 떠난 동강 여행에서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았어요. 류시화 작가의 책에 '재능이 있는데 평생 안 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는 우화를 읽으며 은퇴 후 저의 재능을 잘 펼쳐야겠다고 각오를 다졌죠. 퇴직하기 6년 전부터 신발을 작품으로 풀어내기 시작했고 퇴직하기 1년 전 안식년에는 신발 작품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미술을 처음 접한 사람처럼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작업을 했어요. 기회가 되면 재능기부를 해야겠다는 포부도 가졌습니다."

강혁 작가는 마흔을 넘기면서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작업을 마음껏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 앞으로의 작업 방향 등 불안과 혼란이 섞인 가슴앓이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화구만 챙겨 혼자 기차를 타고 강원도 동강으로 갔다. 그곳에서 발길 닿는 곳에 멈춰 그림을 그리고 히치하이킹을 했다. 4박 5일 동안 그렇게 했다. 신기한 점은 길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면 그때마다 지나가던 차가 멈춰서서 그를 태워줬다. 모두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처음 본 사람을 태워준 이유를 물어보니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말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잖아요." 강 작가는 그 여행을 계기로 화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후 그는 틈날 때마다 작업을 하고 휴일이면 야외로 스케치를 하러 다녔다. 쉼없이 책을 읽었다. 강 작가는 작업실을 인천에서 파주로 옮기면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렇게 회사 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예순세 살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강혁 작가는 전시회를 마친 후 두 작품을 기증했다. 한 작품은 4.16재단(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아이들이 마음껏 꿈꾸고 일상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비영리 재단법인), 그리고 한 작품은 그가 30여 년 몸담은 MBC이다.

"예순이 넘어 첫 개인전, 지금이 작업하기 제일 좋아"
 
 강혁 작가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더 이상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 작품을 4.16 재단에 기증했다. 218×180cm 사진제공/ 강혁 작가
ⓒ 김희정
  
- 오랫동안 직장생활과 화가의 생활을 병행하셨습니다. 그만큼 화가를 바라보는 시각도 남다를 것 같아요.
"직장생활을 할 때는 동료 작가들한테 항상 존경과 미안함이 있었어요. 1980년대부터 민중미술 작업을 같이 해온 동료 작가인데요, 그들은 수입이 없는데도 미술 작품을 통해 민중의 삶과 당대 사회 현실을 알리고 보여주는 활동을 했어요. 미술을 통해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로 가는 데 이바지 했지요. 그에 반해 저는 경제 활동을 하는 부르주아가 되어 그들 활동에 숟가락을 한 개 얹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그 당시 저는 뉴스데스크의 뉴스그래픽을 담당했는데요, 밤 열 시에 퇴근하면 그 길로 동료작가 모임에 합석했고 술값을 내는 것으로 참여의 의미를 더하곤 했지만 스스로 위축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한편 작업만 하는 작가들을 향한 부러움도 있었습니다. 저는 작업을 하고 싶어도 직장에 다니느라 맘껏 못하고 있는데 재주가 탁월한 작가들이 더 치열하게 작업을 하지 않고 술 마시고 시대 한탄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고요.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지나쳐서 동료 작가들한테 간섭도 했습니다. 작가들은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는데 그랬어요."

- 어떤 고충이었나요?
"여러 가지 가운데 생활고가 가장 커 보였습니다. 한 달에 이십만 원에서 백여만 원 수입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들 실력이 뛰어난 작가인데 수입이 너무 적다 보니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미술협회나 문화재단 관련자들을 만나면 병원이나 기관과 결연을 맺어 작가들이 건강 관리를 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달라는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훌륭한 미술가들이 사라지지 않고 자기 역량을 충분히 펼칠 수 있도록요."

- 예순이 넘어 첫 개인전을 여셨습니다. 인생의 때에 대한 작가님 생각이 궁금합니다.
"청년 시절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시행착오나 방황을 해도 다시 시작할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치열하게 해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인생에 늦은 때는 없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에 충실하고 있을 때가 가장 빛나는 때라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를 보고 늦은 나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시장에 처음 제 작품을 걸었을 때 마음이 뭉클하고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제 나이가 작업하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서른에 한 가정의 가장이 됐고 가장으로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책임감도 끝냈습니다. 아이들도 잘 성장했고요. 제가 사는 경북 영양군 청기면은 자연이 훼손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라 작업 환경도 더없이 좋습니다. 다음 작업에 대한 열정도 넘칩니다. 무엇보다 현재 제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여전히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는 게 저는 참 좋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제 작품을 통해 치유 받고 삶의 의미 찾았으면"

 
 2020 코로나 시대 타워와 그 속에 갇힌 신발이 답답한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 하다. 90×180cm.
ⓒ 강혁 작가 사진 제공
- 여전히 꿈을 꾸신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꿈을 꾸시나요?
"제 작품이 뉴욕의 현대미술관에 걸리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전시회도 계속 열고요. 어린이 예술학교를 세우고 싶은 꿈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연에서 맘껏 뛰놀고 미술을 배우고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그런 학교입니다. 또 한 가지 소망은 제 작품을 통해 누군가 위로와 치유를 받고 희망과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강혁 작가는 청년 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즐겨했다. 그의 작업실에는 만육천 권 정도의 장서가 있다.

- 작가님한테 2020년은 어떤 해였습니까?
"2020년은 코로나19로 모든 사람이 고통받는 해였지요. 2019년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들, 마스크를 벗은 채 악수하고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는 평범한 일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했는지 깨닫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해였어요. 2019년에 계약한 전시회를 열 수 있어서 또한 감사했습니다. 코로나 속이라 오시는 분들께 죄송하고 조심스러운 마음 많았는데요, 그래도 여러 분들께서 방역수칙을 지켜가면서 호응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살아오시면서 고마운 사람은요?
"저와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이 고맙습니다. 먼동이 틀 때부터 밭에 나가 일하시는 동네 할머니, 코로나 시대에 희로애락을 함께 한 사람들,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저한테는 귀합니다. 그래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제 아내입니다. 아내는 삶이 어려울 때나 지금이나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지해준 사람입니다. 

작업실을 따로 마련하기 전까지는 베란다나 집 한 켠에 그림 그릴 공간을 마련해 줬습니다. 저의 생일 때마다 화구를 선물해줬고요.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도시의 편리한 삶을 뒤로하고 청기면 시골 생활도 함께 해주니 또한 고맙지요."

강혁 작가는 현재 양쪽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다. 어린 시절 홍역을 치른 후 난청이었던 게 지금까지 줄곧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는 생활이 어려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뒤늦게 졸업했다. 30대에는 하고 싶은 그림 작업을 뒷전으로 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직장 생활과 화가 생활을 병행할 때는 중간에 끼어 외로웠다. 아웃사이더일 때 그는 어린 시절 옛 향수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그의 삶은 굽이굽이 돌아갔다. 그런데도 그는 어렸을 때의 꿈, 화가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 꿈을 향해 우직하게 걸어왔다. 그러니까 그의 신발 작품 안에는 인생의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 삶을 향한 끊임없는 애정과 희망, 오늘 하루 부지런히 다니느라 애쓴 그와 우리 이야기가 녹아 있었던 것이다.

강혁 작가는 지난 전시회 작품을 정리하면서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다. 코로나가 하루 빨리 종식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안에 든 삶의 다양한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