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내 다리 내놔" 원조좀비부터 구미호까지.. 'K공포물'의 시작

2021. 1. 23.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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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KBS'전설의 고향'


‘전설의 고향’(KBS)은 1970~80년대를 풍미한 고전 판타지 장르물이다. 흔히 ‘납량특집 호러물’로 각인되어 있으며, 머리를 푼 처녀 귀신이나 검은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 등 한국적 공포 이미지의 원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체 시리즈가 호러는 아니었다. 사후세계나 비인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잔잔한 사극도 많았다.

가령 효자나 열녀가 복을 받는 권선징악의 교훈극이나, 저승 사무에 착오가 생기는 식의 판타지물이 생각난다. 이들은 각기 독립된 이야기지만, 나름 완결적인 세계관을 공유한다. 유교, 불교, 도교에 샤머니즘, 토테미즘, 애니미즘 등 토속적인 사상이 뒤섞인 것으로,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들어오기 전 전통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총 670화… 한국 고전 판타지 백서

‘전설의 고향’은 1977년부터 1989년까지 578화가 방송되었다. 12년간 인기를 누렸지만, 소재 고갈로 종영되었다. 그러나 섭섭함이 컸던지, 1996년에 부활해 1999년까지 74화가 더 만들어졌다. 당시 한국영화 ‘여고괴담’이나 일본영화 ‘링’이 개봉하면서 새로운 공포물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조악한 특수효과와 엄격한 방송심의로 제약이 많았던 ‘전설의 고향’은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2008년과 2009년에 시즌제로 18화가 더 만들어져 향수를 달랬지만, 시리즈를 이어갈 동력은 없었다. 결국, 1977년부터 2009년까지 총 670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굉장한 콘텐츠의 보고이다.

‘전설의 고향’ 말미에는 “이 전설은 어느 지역, 어느 표지물에 얽힌 전설”이라는 성우의 목소리로 고풍스러움을 더했다. 이처럼 민속지적 출처가 명확한 때도 있었지만, 국내외 여러 설화를 뒤섞거나 영화 등 다른 콘텐츠의 영향을 받은 창작물도 꽤 있었다. 이런 경우 “이러저러한 교훈을 담은 전설입니다”라는 해설이 달렸다. 그런데 그 많은 이야기는 누가 어떻게 수집한 걸까. 어렸을 땐 당연히 제작진이 직접 수집하러 다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 시절 열악하고 촉박했던 제작환경을 생각하면 어려웠을 것이다. 초기엔 ‘연려실기술’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고전문헌을 참조한 것도 있었지만, 방대한 원천이 따로 있었다.

당시 구비문학 자료를 수집하는 국가적인 사업이 진행되었다. 1978년 6월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창립되면서 어문학연구실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서 전국의 구비문학 자료를 조사하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각 지역의 신화, 전설, 민요, 무가, 만가, 풍습 등을 취재하고 기록하는 아카이빙 작업을 벌였는데,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총 82권을 엮을 수 있었다. ‘한국구비문학대계’란 이름으로 발간된 이 장서에는 설화 1만4,941편, 민요 5,922편, 무가 375편이 실려 있다. 이 자료들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지금 인터넷으로 누구나 검색할 수 있다. ‘전설의 고향’은 주로 여기에 실린 자료들을 소재로 삼았다. 국가적인 채록 작업이 없었더라면 ‘전설의 고향’이 670편이나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설의 고향’은 한국 구비문학 콘텐츠의 집적물이란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설의 고향’을 보고 자란 세대의 무의식에 판타지의 원형을 심었다는 데 있다. 즉 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이들은 사후세계나 귀신 괴수 등을 떠올릴 때, ‘전설의 고향’에서 재현되었던 이미지를 일차적으로 떠올린다. 이전 세대들이 옛날이야기를 듣거나 그림책을 보면서 각자 자유롭게 이미지를 상상해왔던 것과 달리, 해당 세대는 ‘전설의 고향’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상상계 일부로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후 세대들이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웹툰, 유튜브 등 훨씬 다양해진 매체를 통해 판타지물을 접하면서 형성한 무의식적 심상과도 구별된다.

대표 아이템 ‘구미호’, 너의 출처는?
1977년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장면들. 한반도 전역에 전해지는 전설, 민간 설화 등을 바탕으로 한국적 공포물의 원형을 만들었다. KBS 제공

‘전설의 고향’을 대표하는 에피소드는 뭘까. 혹자는 ‘덕대골’을 꼽는다. “내 다리 내놔”로 유명한 이 에피소드는 1983년과 1996년에 두 번 만들어졌는데, 매장된 시체의 다리를 자르자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계속 쫓아온다는 오싹한 이야기로, 좀비 액션물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만들어진 이야기는 단연 ‘구미호’다. 1979년 한혜숙을 시작으로, 선우은숙, 정애리, 김미숙, 장미희 등이 구미호 역을 맡았다. 이후 박상아 임경옥 송윤아 노현희 김지영 박민영 전혜빈 주연의 무수한 판본이 있는데, 이들 판본의 줄거리와 설정은 다소 다르다. 2000년대에 만들어진 에피소드는 구미호가 남편을 떠난 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속편에 해당한다.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판본은 1979년 한혜숙 판본이며, 1997년 송윤아 판본이 이를 충실히 계승한다.

한혜숙과 송윤아 판본의 ‘구미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드실 것을 구하기 위해 산에 간 남자가 큰비를 만나 숨을 곳을 찾다가 사람의 간을 빼먹고 있는 구미호와 마주친다. 벌벌 떠는 남자에게 구미호는 살려줄 테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른다. 남자는 산에서 내려오다 여자를 만나 결혼한다. 아이를 낳고 살던 10년 후 어느 날, 큰비가 내리자 남자는 구미호를 만났던 이야기를 꺼낸다. 아내는 갑자기 구미호로 변신하여, 남자를 죽이겠다고 노려본다. 그리곤 “더러운 게 정이라더니, 인간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라는 일갈을 남기고, 아이를 안고 홀연히 사라진다.

어린 시절 본 ‘구미호’는 특수분장이 너무 무서웠지만, 묘한 여운을 남겼다. 본래 남자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하지만, 자신의 힘과 목적을 숨긴 채 가부장제와 인간의 규율에 맞추어 살아가다가 남자가 신의를 저버린 순간, 그에게 매달리거나 원한을 풀어놓는 대신 하찮은 남자 따위 그럴 줄 알았다며 모든 책임을 자기 것으로 돌리고 쓸쓸히 사라지는 비극적 영웅의 풍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무력한 여인의 모습과도 다르고, 완전히 파멸되는 대신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선택지를 가졌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를 남자 따위에 종속되지 않는 호방한 여성 주체의 내면이라 해야 할지, 억압적인 현실에서 체념을 통해 괴상한 정신승리에 도달한 상태라고 봐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서늘한 매력을 풍기는 존재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 전통 설화에 가부장제에 순치되지 않는 오롯한 여성 괴수 이야기가 있음을 곱씹으며 자랐지만, 성인이 된 후 일본의 대표적인 공포영화 ‘괴담’을 본 후 충격에 빠졌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1969년 작 ‘괴담’은 옴니버스 영화로 ‘흑발’ ‘설녀’ ‘귀 없는 호이치’ ‘찻 잔 속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설녀’가 ‘구미호’와 똑같다. 설녀가 구미호로 바뀌었을 뿐 서사, 장면구성, 카메라워크, 조명까지 판박이 같다. 어찌 된 걸까. ‘구미호’가 ‘설녀’를 표절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 연도도 앞서고, 출처의 명확성도 차이 나기 때문이다. 위와 똑같은 설녀 전설이 고이즈미 야쿠모가 채록하여 엮은 책 ‘괴담’에 수록되어 있고, 도쿄 부 니시타마군 쵸후마을(현 오메시)에는 ‘설녀의 땅’이란 비석이 있을 만큼 출처가 명확하다. 반면 한국에 구미호와 관련된 설화는 많지만, 위 서사와 유사한 흐름의 이야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표 아이템인 ‘구미호’가 한국 전설이 아니라, 일본영화의 표절을 통해 유입된 일본 전설이라니 씁쓸하다. 그러나 노성환 교수가 ‘한국의 구미호와 일본의 설녀’라는 논문에서 분석하듯이, 구미호가 인간과 결혼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의 모티브를 발명해낸 것은 독창적이다. 이후 판본을 통해 구미호가 인간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계속 보충적으로 만들어지는데, 이것 역시 새로운 전통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 즉 과거 전설을 채록하고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내외에서 따온 원본 위에 끊임없이 새로운 서사와 상상을 덧붙이는 과정을 통해 문화콘텐츠가 풍성해진 결과를 만든 것이다.

이런 경향은 근래 드라마 ‘도깨비’, 영화 ‘신과 함께 1, 2’ 드라마 ‘호텔 델루나’ ‘구미호뎐’ ‘경이로운 소문’ 등을 통해 더욱 또렷이 드러난다. 전통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출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참조 사항들을 조각보처럼 이어 붙여 지극히 혼종적이고 현대적인 판타지물을 만들고 있다. 지금 이런 영상물들을 보고 자라는 세대들은 아마도 저승사자나 사후세계를 상상할 때 ‘도깨비’나 ‘호텔 델루나’의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른다. ‘전설의 고향’은 종영되었지만, 저승사자, 삼신할미, 도깨비 등의 이미지와 갖가지 모티브로 한국인의 무의식에 깊숙이 남아있는 것처럼, 지금 새롭게 만들어지는 판타지물들도 그러할 것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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