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학살' 그린 영화.. 마지막 장면의 의미
[원종빈 기자]
▲ <미스터 존스> 스틸컷 |
ⓒ (주)디오시네마 |
1. 영국 수상의 외교 보좌관으로 일하던 '가레스 존스(제임스 노턴)'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선전하는 스탈린 정권의 경제적 기반에 의혹을 품고, 직접 스탈린을 인터뷰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존스는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 '월터 듀란티(피터 사스가드)'를 만나 협조를 청해 보지만 스탈린에 대한 의견 차이를 확인하는데 그친다. 소련 당국의 농간과 삼엄한 감시 때문에 좀처럼 정보를 얻지 못하던 존스는 마침내 베를린 출신의 기자, '에이다 브룩스(바네사 커비)'로부터 우크라이나에 진실이 숨어 있다는 힌트를 듣는 데 성공한다. 이에 존스는 힘겹게 우크라이나로 잠입하고, 참혹한 진실을 마주한다.
1932에서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스탈린의 집단 농장화 정책이 자영농들의 반발에 직면함에 따라 농업 생산량이 급락하고, 이로 인해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라고 불리는 대규모 기근이 닥쳤기 때문이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미스터 존스>는 이 재앙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소련에 잠입한 한 남자의 여행기를 그려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단순히 과거 스탈린 정권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스터 존스>는 기자들마저 사건 은폐에 가담한 와중에 홀로도모르의 진상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가레스 존스는 정작 기성 언론에 소속된 기자가 아니었다는 아이러니를 파고들어 의무를 다하지 못한 언론의 흑역사를 가차없이 고발한다.
▲ 영화 <미스터 존스> 스틸 |
ⓒ (주)디오시네마 |
우선 영화는 개러스 존스와 월터 듀란티 간의 대립을 보여준다. 개러스는 친구의 추천을 받아 월터에게 스탈린을 인터뷰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와 월터의 만남은 언제나 서로를 마주 볼뿐, 결코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 월터가 주최한 파티에서도 존스는 파티를 즐기지 못해 옷을 완전히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하지만, 월터는 분위기에 완전히 녹아들어 나체로 존스와 대화한다. 이처럼 언제나 마주 보고, 공통점은 전혀 갖지 않는 둘의 관계는 두 인물이 진실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월터 듀란티는 언론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는 일방적으로 소련을 옹호하는 등 기자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소련과 미국의 관계 진전만을 강조하며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도 없고, 진실마저도 자신이 믿고 싶은 것으로 만들어낸다. 반면에 존스는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세상에 알릴 의무와 책임을 지니지 않지만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해낸다. 영화는 이를 거듭 강조한다.
소련 대사관에서 존스가 언론인 비자를 신청하자 담당자가 의문을 갖는 것, 왜 언론인 자격으로 소련에 입국했냐는 소련의 외교 당국자의 질문, 우크라이나의 실상을 알아챈 그에게 소련 당국이 협상을 제안하는 장면까지 영화는 존스가 기자가 아님을 계속해서 일깨운다. 그 결과 진실을 추구하는 존스의 여정은 그의 의무가 아니기에 더욱 숭고하게 느껴진다. 더 나아가 이렇게 기자의 책무와 신분이 불일치하는 존스와 월터의 관계 덕분에 월터가 존스의 폭로를 한 개인의 과대 포장된 의견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글을 기고하는 장면은 본연에 충실하지 않은 언론을 향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힌다.
▲ 영화 <미스터 존스> 스틸컷 |
ⓒ (주)디오시네마 |
사실 오프닝 장면과 함께 보면 <미스터 존스>는 존스의 역경이 갖는 가치만큼이나 그가 발견하고 전달한 진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조지 오웰이 타자기 앞에서 글을 쓰는 장면과 돼지들이 농장 안에서 요란하게 울부짖는 장면을 교차하며 시작된다. 이때 "진실은 너무 이상해서 다른 식으로 말하기 어렵다(...) 나는 괴물들의 침략을 받고 있는 시대에 산다. 하지만 그 얘기는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오웰의 내레이션도 함께 흘러나온다.
결국 영화의 오프닝은 앞으로 약 2시간 동안 들려줄 존스의 이야기가 결국 진실을 마주할 때의 아픔을 극복하는 용기와 고통에 관한 것임을 알려주는 셈이다. 작중 기자가 아닌 이들만이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세상에 알린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오웰이 존스의 목격담을 흔히 허황된 이야기로 여겨지는 소설에 담은 대목은 꼭 정해진 방식이 아니더라도 진실을 대면하고 인정하고 그것을 풀어낼 용기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4. 영화는 언론의 역할에 희망과 비관을 동시에 던지면서 마무리된다. 그 중심에는 존스의 조력자로 활동한 인물인 에이다가 있다. 월터 듀란티 밑에서 일하는 기자인 그녀는 듀란티도 인정하듯 빼어난 실력자다. 그러나 그녀마저도 생존을 위해 진실을 짐작하면서도 회피하며, 자신의 짐작이 현실이 되어 일상을 파괴하는 것을 거부하며 소련의 감시에 순응한다. 그래서 그녀는 존스가 우크라이나로 떠나기 직전 그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를 거절한다. 그녀에게 그는 단지 매력적인 한 남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기자로서의 정신, 윤리,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춘 불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목숨을 건 존스의 여정을 지켜보면서 듀란티의 회유를 힘겹게나마 거절할 용기를 얻는다. 또한 안정된 직장과 일상을 거부한 채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발언의 자유가 사라져 가는 히틀러와 나치 치하의 베를린으로 되돌아갈 기개도 되찾는다. 그녀가 존스에게 자신의 힘이 닿는 한 독일에서 점차 사라지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그녀의 변화와 각오는 영화 말미 비관적인 현실을 일깨우는 자막이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언론에 기대할 수 있는 일말의 자정 가능성과 희망이 있음을 알린다.
5. 저널리즘의 본질이 진실 추구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기자들의 직업정신과 윤리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나가기 위해 필수적인 감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찾아낸 사소한 듯 보이는 불씨는 이내 세상을 바꾸는 촛불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언론인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진다.
다만 강한 자부심은 강한 고집과 편견으로 변질되어 기자들이 보려고 하는 현실이 진실을 모두 담지 못하는 문제를 발생시키도 한다. 그래서 언론은 언제나 보이는 것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없는지를 꾸준히 성찰해야 한다. 또한 언론은 자신이 현실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자각하고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 이는 월터와 존스가 함께 있을 때 카메라가 그들을 직접 잡기보다는 유리창과 대리석 등에 비춘 그들의 모습을 잡는 이유다. 더 나아가 영화가 창문틀(프레임)을 통해 조지 오웰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 개러스 존스가 창문틀(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쏟아지는 서울 난개발 공약, 제2 뉴타운 광풍 우려"
- 이재용 2년6개월, "과하다" 46.0% - "가볍다" 24.9% - "적당" 21.7% - 오마이뉴스
- "28일이면 사법농단 법관 사표수리, 시간이 없다"
- '표절' 문학상 손씨 "돈 필요해 도용.... 왜 이지경 됐는지 모르겠다"
- 정부 보도자료에 이 두개가 왜 없나요?
- 3차 개각 외교부 정의용, 문체부 황희, 중기부 권칠승
- 15년 걸린다더니... 단 3일만에 쌍용천 뒤덮은 초록물의 의미
- 김종인, 이익공유제 연일 비판... "그런 건 지금 할 수가 없다"
- '유리천장' 깬 강경화, 3년 7개월만에 물러난다
- '주호영 폭격' 민주당, 이재명도 합세 "저주의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