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시어머니가 담근 김치

2021. 1. 20.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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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느 누가 손수 담근 김치를 주겠다는데 싫어하겠는가.

우스갯소리로, 담근 김치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주는 방식에 따라 김치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것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싫어하는 방식은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와 함께 담근 김치를 싸 들고 서울에 있는 며느리 집을 방문하는 것이다.

며느리가 시댁을 방문할 필요도 없고, 시어머니가 손수 김치를 가지고 며느리 집을 방문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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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연세대 교수·심리학과)


세상에 어느 누가 손수 담근 김치를 주겠다는데 싫어하겠는가. 그런데 이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주는 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우스갯소리로, 담근 김치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주는 방식에 따라 김치에 대한 선호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며느리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은 주말에 온 가족이 시댁을 방문해 하룻밤 자고 다음 날 김치를 들고 돌아오는 것이다. 김치를 함께 담그자는 것도 아닌데도 싫어하는 걸 보면 김치를 받는 것보다 시댁에서 하룻밤 자는 게 더 불편한 모양이다.

이것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싫어하는 방식은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와 함께 담근 김치를 싸 들고 서울에 있는 며느리 집을 방문하는 것이다. 방문 소식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설 것이다.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 것도 불편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시어머니의 매서운 눈으로 평가당할 살림 실력과 가정생활일 것이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이 두 방식을 불편해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좀 더 친절하고 덜 부담스러운 방식을 택한다. 담근 김치를 시골에서 가지고 올라와서 경비실이나 현관 앞에 두고 가는 것이다.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정도면 최선의 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며느리가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다. 집 앞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시게 한 것이 며느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담근 김치를 택배로 부치면 된다. 며느리가 시댁을 방문할 필요도 없고, 시어머니가 손수 김치를 가지고 며느리 집을 방문할 필요도 없다. 시어머니에게 약간 손해 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사랑하는 아들과 손주들에게 담근 김치를 먹일 수 있다는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데 며느리가 택배보다 더 선호하는 방식은 따로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치 자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우스갯소리겠지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 쉽게 말하면, 김치고 뭐고 시어머니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피하려고 한다면 수많은 방법이 즐비해 있다. 몸도 피곤하고, 바쁘고, 아이들 학원 일정표도 꽉 차 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서 한 교수가 추석에 수업한다고 했더니 며느리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 며느리들만 시어머니를 불편해하는 것은 아니다. 시어머니 눈에도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매한가지다.

왜 이리 불편한 관계가 됐을까? 시어머니는 원래 나쁜 사람인가? 요즘 며느리는 정말 기본이 안 돼 있나? 절대 그렇지 않다. 시어머니는 누군가의 가슴 절절한 ‘엄마’이고, 며느리는 누군가의 목숨보다 소중한 ‘딸’이다. 하지만 이런 소중한 분들이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명함으로 위계를 갖추게 되면 서로서로 불편해한다. 직원이 사장을 좋아하기 어렵고, 직원이 사장 마음에 들기 어려운 이치와 같다. 위계를 통해 사회와 가정을 더 잘 운영하고 싶었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대가는 가혹하다.

서로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미워하게 된다. 며느리가 눈물 뚝뚝 흘리며 시어머니 욕하는 것 들어보면 안다. ‘세상에 딸 가진 부모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시어머니가 가슴 치며 며느리 욕하는 것 들어보면 안다. ‘세상이 말세라고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위계는 사람을 잃게 하는 마법과도 같다. 위계로 얻고 싶은 것을 억지로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위계를 유지한 채 ‘딸 같은 며느리’를 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친엄마에게 위계를 느끼는 딸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친엄마 같은 시어머니’도 불가능하다. 위계를 함께 원한다면.

김영훈 (연세대 교수·심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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