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우 칼럼] 매일 법안 30개씩 찍어내는 국회

2021. 1. 2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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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 시작 8개월 만에
의원 발의 법안 7000개
법안당 심사시간 3분 불과

"국회도 의원도 통과된 법률 책임질 수 없는 상황"

국회 입법 기능 마비시키고
모든 것 법으로 해결하려는 처벌 만능주의 사회 조장

정당의 정책·법안 조정 기능 살리고 저질 법안 양산 의원 규제하는 '입법 규율' 필요

21대 국회 임기는 지난해 5월 30일 시작됐다. 233일째 되는 18일까지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6952개다. 매일 29.8개의 법안이 쏟아져나온 셈이다. 같은 기간 20대 국회(4619개)에 비해 50% 넘게 증가했다. 19대 국회에 비해서는 2.4배나 된다. 이 추세대로라면 21대 국회의 법안 발의는 4만건이 넘을 전망이다. 그야말로 입법 홍수다.

입법부가 법 만드는 게 뭐가 문제냐 할 게 아니다. 법안의 질이 형편없이 낮아지고 있다. 법안 발의자가 문제점이나 부작용이 있다고 인정해 스스로 취소한 ‘철회 법안’이 이번 국회 들어 62개나 된다. 하루나 이틀 만에 취소한 경우도 여럿이다. 법안이 공장에서 물건 찍듯 쏟아지니 법률로 반영되는 비율도 낮아진다. 14대 국회에서 80.7%였던 법안 반영률은 20대 국회에서 36.6%, 21대 국회 들어서는 18일 현재 19.3%로 급락했다.

국회미래연구원 박상훈 박사가 쓴 ‘더 많은 입법이 우리 국회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보고서에는 한국 국회의 실상이 잘 드러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접수된 법안을 모두 심사한다고 가정하면 법안 한 건당 심사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은 20대 국회 기준 6.6분에 불과하다. 이번 국회 들어 법안이 50% 이상 늘었으니 법안 한 건당 심사 시간은 3분대로 줄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20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을 역임한 한 의원은 “부실한 법안이 한두 개가 아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법이 아니라 의원들을 위한 법 만들기가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법안 발의 실적 자체에만 연연하는 의원이 상당수라고도 했다.

16년 경력의 한 의원 보좌관은 “의원들도 다른 사람이 낸 법안은 거의 안 본다. 여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다가도 때가 되면 한 번에 몰아서 수백 건씩 통과시킨다. 국회가 만든 법률을 국회도, 의원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다”고 고백한다.

법안을 보지도 않고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리는 ‘법안 품앗이’는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사전에 법안을 검토한 뒤 공동발의 하는 게 이제 예외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의원이 자기가 공동발의 한 사실을 잊고 상임위 표결에서 그 법안에 반대하는 웃지 못할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과도한 법안 발의와 빈번한 법안 제·개정의 폐해는 막대하다. 법안이 폭주하면 갈등적 요소가 적은 ‘비쟁점 법안’을 먼저 다루게 되는데, 이로 인해 정작 중요한 법안들이 처리되지 않는다. 법안 모두가 법률이 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법안 10개 중 8개가 건수만 기록하고 사라지는 건 우리 국회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이로 인해 법안 심사와 토론, 조정 등 국회 입법 기능에 심각한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 예·결산과 행정부 견제 등 국회가 해야 할 다른 역할도 어려워진다.

입법 홍수와 이로 인해 늘어나는 각종 법률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해악도 심각하다. 공동체 구성원 간 신뢰와 이해에 바탕을 둔 사회가 아니라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법 만능주의 사회를 부른다. 박상훈 박사는 고소·고발·소송 등 법의 처벌에 호소하는 경향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 한국에서는 연간 약 50만건의 고소·고발이 접수되는데 이는 일본의 50~60배에 이른다.

왜 국회는 입법 건수 전쟁터가 되었나. 언론과 시민단체가 의원의 의정활동 평가 지표로 법안 발의 건수와 같은 양적 지표를 사용한 이후 이러한 경향이 본격화됐다는 건 확실하다. 정당의 공천 심사에서 이런 양적 성과를 반영한 영향도 크다.

하지만 정당이 마땅히 해야 할 정책조정 기능에 손을 놓은 게 근본 원인이다. 비슷한 취지의 법안이라면 당 지도부가 사전에 조율하는 정책·법안 조정 기능은 정당의 기본이다. 이게 여야를 막론하고 작동하지 않는다. 정당이 사라진 자리를 300명 의원 개개인의 법안 만들기 무한 경쟁이 차지했다. 정당이 아니라 선거 승리에만 목 매는 ‘상설 대선 캠프’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심각한 정치·국회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선 정당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법다운 법을 만드는 게 목표가 돼야 한다. 양적 지표 비중을 줄이고 내용을 중복하고 쪼개서 발의하거나 표기 몇 개를 고치는 등으로 법안 건수를 채우는 양심불량 의원들을 규제하는 ‘입법 규율’을 세우는 게 급선무다.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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