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배우탐구㉕] 큰 그림 보는 배우, 하정우..그의 존재 의미

홍종선 2021. 1. 1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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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하정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는 말을 흔히 한다. 한 발짝 물러나 큰 그림을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얘기다. 영화 기자라 해도 한 명의 욕심꾸러기 관객인 건 어쩔 수 없어서, 아니 가장 욕심 많은 관객이어서 세포를 깨우는 연기, 적당히 조미료 친 연기를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전자에 대해선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나 연기한다’ ‘정말 잘하지?’ 하듯 도드라지게 하는 연기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계기가 있었다. 13년 전 영화 ‘추격자’를 보고서다.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 배우들이 됐지만, 개봉 당시 김윤석과 하정우는 당대 최고 스타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열광했고, 입소문에 발이 달려 방방곡곡 퍼져나갔다. 데뷔작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감독 나홍진의 감각적 연출까지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지만, 뒤집어 말하면 연쇄살인마 지영민 역의 하정우, 그를 쫓는 추격자 엄중호 역의 김윤석, 명연기가 있었기에 ‘추격자’는 오래도록 남을 작품이 됐다.



영화 '추격자' 포스터 ⓒ㈜쇼박스 제공

당시 세 남자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김윤석과 하정우의 연기는 스크린 안에서뿐 아니라 촬영장에서도 뜨겁지 않았다, 심지어 뜨겁게 느껴졌던 지영민 은신처 마루에서의 난장 싸움에서조차. 연쇄살인마 지영민은 스크린에서 싱긋 미소지었고 목소리마저 차분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우리는 낯선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은 유사 연기가 흔해졌지만, 그땐 본 적 없는 류의 살인마 연기였다. 그를 추격하는 엄중호 역시 흔히 보는 악인의 대척점, 선인의 명분과 열정으로 휘감겨 있지 않았다. 비리로 경찰에서 잘린 인물이지만, 여자들 몸을 팔아 먹고사는 포주지만, 내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아이 달린 엄마가 심한 몸살로 애원을 해도 매춘을 강요하는 인간이지만 “그날따라 길을 가는데 자꾸만 넘어진 사람을 본다면 한번은 일으켜 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던 김윤석의 말, 딱 그만큼만 표현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그 누구도 흥분하지 않았고 대신 우리가 분노하고 우리가 소름 돋았다. 좋은 노래는 가수가 우는 게 아니라 관객이 우는 것이어야 해서 가수는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는 얘기가 떠오르는 연기였다. ‘추격자’로 김윤석이 아닌 하정우 배우 얘기를 하려 한 건, 베우 김윤석을 덜 좋아해서가 아니다. 나홍진 감독이 당시 인터뷰에서 “영화 ‘추격자’의 촬영장엔 김윤석이라는 큰 산이 있었다, 그는 마스터다”라고 표현했을 만큼 그는 이미 완성형이었다. 그 뒤로도 신중히 작품을 선택,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고 ‘미성년’이라는 걸출한 연출 데뷔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 '암살' '아가씨' '1987' 스틸컷(시계반대방향) ⓒ㈜쇼박스(윗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흥미로운 건 배우 하정우의 행보다. ‘추격자’로 충무로 블루칩이 된 후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유행시키면서도 내리 주연으로 내달리지 않았다. 집 평수 늘리면 좀처럼 줄이기 어렵고, 한 번 ‘주연 맛’을 보면 주연을 고집하고 조연을 고사하게 된다는 통설을 보기 좋게 깼다. 일테면 2015년부터 내리 3년은 주연 아닌 주연급, 엄밀히 말하면 조연 역할을 선보였다. 영화 ‘암살’을 하와이 피스톨, ‘아가씨’의 백작, ‘1987’의 공안부장 역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이 배역을 대하는 배우 하정우의 자세다. ‘주연급’인데 투톱 주연으로 연기하기 쉽고, 멀티캐스팅인데 ‘다 같이 주연’이라는 생각으로 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정우는 ‘암살’이 안옥윤(전지현 분), ‘아가씨’가 히데코와 숙희, ‘1987’이 민주화 항쟁을 이끈 사람들의 스토리라는 것을 명확히 안다. 각각의 영화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 1987년 뜨거운 여름에 어떻게든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파악하고 작품에 임한다면 좀 더 힘주는, 앞으로 나서는, 다른 연기가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하정우가 후자의 관점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큰 그림을 보았으니 선택하기도 하지만, 무엇이 ‘축’인지 정확히 안다는 것이다. 알기에 스스로 축이 되려 하지 않고, 제대로 영화를 떠받친다. 그렇게 해야 하와이 피스톨, 백작, 공안부장도 빛나고 무엇보다 작품이 산다는 것을 안다.


영화 '터널', '멋진 하루' 스틸컷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하정우의 이러한 태도는 주연일 때도 마찬가지다. 화산이 폭발해 긴박한 순간에도 일부러 느리게 걸어 카메라를 멈춰 세울 수도 있고, 그게 연기로만 보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때로 영화의 명장면이 될 수도 있지만, 배우 하정우의 선택은 아니다. 자연스러움, 거기에서 배어 나오는 현실감을 추구한다. 이러한 연기 방식은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힘주지 않아도 어딘가 눈길을 끄는 매력을 지닌 하정우이기에 가능한 연기법이다. 영화 ‘멋진 하루’에서 옛 연인 김희수(전도연 분)의 재촉을 받으며 여기저기 소위 ‘썸’이 과거형 또는 현재형으로 비치는 ‘아는 여자들’에게 돈 꾸러 다니는 조병운, 무너지는 터널 아래 갇혀서도 울부짖고 오열하는 대신 생존의 유머를 잃지 않는 ‘터널’의 이정수가 그렇다.


배우 하정우가 수많은 배우 속에서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 가장 큰 미덕은 전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인간이 놓이면 어떻게 할까, 전체의 절반 이상이 할 것 같은 반응을 가장 리얼하게 대변했을 때 흔히 연기력 칭찬을 받는다. 전형적 연기의 최고봉에 보내는 찬사다. 하지만 하정우는 ‘있을 법한 어떤 인물’을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흔히 보던 인물이 아니어서, 오래도록 봐 온 전형적 연기가 아니어서 낯설긴 하지만 어딘가 수긍이 가고 어쩐지 나 같기도 하다. 힘을 주는 연기, 목소리 키우는 연기 대신 ‘그래 저런 사람 있지, 맞아 있어’의 연기를 한다. 이미 뚫려 있어 쉬운 길 놔두고 굳이 새길을 만든다. 어려운 선택의 목적이 그저 자신이 빛나 보이기 위해서라면 멋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정우의 눈이 관객을 향해 있고 그 덕에 우리가 새로운 캐릭터들을 만나고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스틸컷 ⓒ㈜쇼박스 제공

[홍종선의 배우탐구] 시리즈가 다음 주부터 새로운 코너로 바뀐다. 마지막 회에 일종의 ‘P.S’(추신, Postscript) 덧붙이자면. 영화 ‘남쪽으로 튀어’ 때의 인터뷰로 기억한다. 배우 김윤석에게 연극배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송강호에 관한 질문을 한 적 있다. 김윤석의 답을 듣고 부끄러웠던 질문인데, 하길 잘했다고 두고두고 생각한다. 영화 ‘하울링’ ‘푸른 소금’ 등으로 관객 대중이 배우 송강호의 연기력에 실망감을 표출하는 것에 관해 물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송강호 배우가 연기 방식을 바꿔서 아쉬워하는 걸까요, 거꾸로 이제 바뀌어야 하는 걸까요. 당시 김윤석은 배우 송강호의 연기가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꾸지 말아야 한다고, 잘해 왔고 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똑같은 연기인데 칭찬했고 지금은 아니지만 결국은 다시 찬사를 보낼 것이라고, 그럴 만한 내공과 뛰어남을 가진 배우라고 말했다. 정말로 ‘관상’ ‘변호인’으로 부활했고 ‘사도’ ‘밀정’ ‘택시운전사’ ‘기생충’으로 국민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배우가 나무 한 그루보다 숲, 숲을 넘어 산 전체를 보며 작품을 이해하고 파악해 연기해야 하듯 대중도 큰 그림 속에서, 장기적 관점으로 배우를 보면 어떨까. 그 배우 자체의 색깔과 존재 의미를 믿고 기다려 주는 게 배우를 성장시키고 우리가 더 좋은 영화를 보게 되는 방법일 수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기세 속에 찍어 놓은 대작들도 때를 기다리고 촬영장 시계도 멈췄던 지난 10개월, 새삼 배우들이 그리웠다. 그중의 으뜸은 하정우다. 소처럼 일해서 마치 직장인처럼 계속해서 우리를 흐뭇하게 했던 배우, 하정우가 오는 21일부터 강원도 춘천에서 촬영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반가운 오늘이다.

데일리안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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