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다가올 미래 읽은 이승만, 정치적 도박이 통했다

2021. 1. 19.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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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여운형 중심' 미군정과 갈등
같은 반탁·반공주의 김구와 다른 길
서울 비운채 방미 감행, 비행기 귀국
운 좋게 미 정책 변화와 맞아떨어져


이승만은 어떻게 정권을 잡았나?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 [중앙포토]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면서 극적인 과정들을 접하곤 한다. 그중 하나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이 과정은 지극히 단순하게 해석됐다. 한쪽에서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반공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세계전략 하에서 미 군정의 지원으로 생각하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승만이 냉전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했던 지도자였기 때문에 한반도의 한쪽에서나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전략의 성공이었다고 해석했다.

두 인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는 방식에 의해서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결론에는 차이가 없었다. 한쪽은 미국의 정책이 한국의 민족주의를 무시했다는 비판 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의 정책에 순응한 것을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본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단순하게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기에 외세의 힘으로 역사과정을 평가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랬던가? 삼국 통일에는 당나라의 힘이, 조선의 건국에는 명나라의 힘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는 일본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동했다고만 평가하면 되는 건가?

역사가 인문학이면서 사회과학인 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냉전이라는 구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승만이 이를 이해하고 편승한 유일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1947년까지 김구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반공주의자였다. 그런데 왜 이승만이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선택을 주목해야 하는 인문학 관점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해답을 얻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1947년 3월과 4월의 미 군정 관계자의 메모였다. 제목에 ‘이승만’이 붙어 있는 1947년 3월 5일 자 문서에는 “이승만은 군정과 라이벌의 포지션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킬 것이다. 그가 이러한 역할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 ‘김규식과의 만남’이라는 제하의 4월 9일자 문서에는 “미 국무성이 이승만에게 항공편을 제공한 것은 유감”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메모에 따르면 미 군정이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귀국을 막고자 했으며, 이승만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두 문서만 보더라도 미 군정이 이승만을 지지했거나, 이승만이 미 군정의 정책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기존의 주장은 모두 잘못된 해석이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실상 이 문서들뿐만 아니라 당시 미 군정의 문서 속에는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문서들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미 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비밀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이승만의 정치적 행보 속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로 1946년 5월부터 진행된 지방 순회였다. 당시 미 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향후 정국을 이끌어나가려 했다. 이에 이승만은 바로 지방 순회를 떠났다. 과거 임시정부 세력과 함께 서울에서 반탁운동에 몰두했던 김구의 움직임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1945년 이전 이승만과 김구의 서로 다른 경험이 중요하게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내내 미국에 거주했다. 그는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김구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를 통해서 한국의 독립을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1943년 12월 장개석이 참여한 카이로 선언에서 단일국가로는 유일하게 독립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구는 현대 정치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승만의 지방 순회는 단독정부 수립을 최초로 언급한 ‘정읍 발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순회를 통해 이승만은 지방에서 자신의 명성과 조직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미 군정의 주도 하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될 경우 전국에서 선거가 실시되는 미국식 정치구조가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당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지방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이 읽었던 것은 미국의 정책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시스템이었다.

마치 1992년 등소평에 의한 남순강화를 보는 듯하다. 1978년 개혁개방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던 등소평은 1989년 천안문 사건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싼 논란과 함께 모택동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등소평은 과감하게 중국 남부의 우한·선전·주하이·상하이로 떠났다. 북경에서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권좌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등소평이 주목한 것은 중국인들이 북경에만 살고 있지 않으며, 북경보다도 더 개혁개방의 성과가 있는 지역을 방문함으로써 중국인들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고, 그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둘째로 1946년 12월 이승만의 미국 방문이었다. 미 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던 상황에서 서울을 비운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또한 김구와의 정치적 주도권 경쟁 역시 중요한 변수였다. 서울에서의 조직적 힘으로 본다면, 오히려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김구의 세력이 더 강한 상황이었다. 이 순간 서울을 비운다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한국에만 있어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미 군정과의 불편한 관계를 돌파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자신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의 선택은 무모한 것이었다. 그가 미국에 간다고 해서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의회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승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답장을 기약할 수 없는 편지를 보내는 것, 그리고 미 군정의 정책을 친공정책으로 비난하는 몇몇 연설의 기회뿐이었다.

하늘이 기회를 내린 것인가? 이승만이 방문하던 기간 동안 미국의 정책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세계체제의 개편보다는 소련을 봉쇄하는 정책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정책 변화를 자신의 성과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위에서 인용한 미 군정 요원의 메모에서 이승만의 귀국을 막고자 한 데에는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 변화를 자기의 성과인 양 선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짜뉴스가 정국에 파란을 몰고 올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미 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귀국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미 군정과의 갈등이 계속되었지만, 미국의 정책 변화와 함께 그가 쌓아올린 전국적인 명성과 조직은 1948년의 결정적 순간 빛을 발하였다. 물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권력은 그가 원했던 완전한 모습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거하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의 임명에도 입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그 권력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헌법 하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1952년 발췌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이라는 무리수를 두어야 했다.

이렇게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가 정확하게 읽었던 미래의 시스템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고, 무모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 정치적 결단도 있었다. 어쩌면 시쳇말로 운칠기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가? 만약 지방순회를 할 때 서울에서 좌우합작위원회가 성공했다면? 만약 이승만이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의 정책 변화가 없었다면? 이승만이 그런 상황 변화를 미리 알고 미국에 갔다고 한다면, 이는 거의 ‘신공’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백단’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때와 같은 현재의 세계적 대전환기에 무모할 정도의 모험을 하면서 운칠기삼을 기다려야 하는가? 분명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체제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행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1948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는 과학적 방법만으로 분석할 수 없다. 물론 그의 정치활동이 결국 분단과 전쟁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는 역사적 평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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