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돈 벌었는데 나만 마이너스? 가슴 속 불 화병 쉽게 여기지 마세요
가슴에 열정이 아닌 분노가 불타는 요즘. 내 가슴속의 불, 화병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요즘에는 기분 좋은 소식보다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안 좋은 뉴스들만 가득하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착 가라앉게 되는 지금,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화병은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한스러운 일을 겪으며 쌓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몸과 마음의 질병을 의미한다. 미국의 정신질환 진단 분류체계인 DSM-4에서는 화병이 한국에만 있는 질병이라며 ‘Hwa-byung’으로 표기한다. 주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힐 듯하며, 뛰쳐나가고 싶고, 뜨거운 뭉치가 뱃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증세와 불안, 절망, 우울, 분노가 함께 일어난다고 알리고 있다.
화병에 대한 역사는 꽤 깊다. 최초의 화병의 주인공으로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인물은 조선 시대의 왕 선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는 화병을 앓는 것이라서 계사를 보고부터는 심기가 더욱 상하여 후문(목구멍)이 더욱 폐쇄되고 담기(가래)가 더욱 성한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급작스레 왕위에 올라 두 번의 전쟁을 겪었던 선조에게 화병은 견디기 힘든 질병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화병의 증상은 심해져 이후에는 왼쪽 다리에 열이 나고 아파 신발을 신기도 힘들어했다. 실제로 요즘도 화병 환자 중에는 다리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물론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사람이 화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 화병의 보편화에 도화선이 된 것은 한국 특유의 대가족 제도와 문화를 꼽고 있다. 여성 억압적인 가부장제와 효를 강요하는 가족 문화가 화병을 우리의 전통 질병으로 만든 셈. 실제로 1900년대 가족제도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소설 속에는 수많은 화병의 희생자가 등장한다. 1914년 작품인 『안의성』의 주인공 정애는 시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가 시누이들의 모함을 받고 친정으로 쫓겨나 화병에 걸린다.
주목할 만한 점은 화병의 주요 대상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우국충정으로 생긴 남성 화병 환자가 늘었으며, 산업화와 민주화의 바람이 불 때는 정권의 추태에 분노하며 화병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모두가 기억하는 한국의 뼈 아픈 한 페이지인 1997년 외환위기 시기에는 취업난으로 인한 화병이 젊은이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졌다.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에서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똑똑한 세대’인 주인공이 “우리는 왜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라며 억울해하는 대목은 화병이 젊은이들에게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과거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평등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화병 환자는 늘어나는 추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화병에 따른 연간 보험급여 비용은 2013년 약 12억5000만 원에서 2017년에는 20억 원으로 늘어났고, 2019년에는 약 26억 원에 달했다. 특히 10대와 20대 젊은 세대의 화병 진단은 지난 5년간 2배 이상 늘어나며 전 연령대에서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다. 젊은 세대에서는 남성 환자의 수가 늘어나는 추세다. 여전히 여성의 비율이 높긴 하지만, 나이가 젊을수록 남성의 비율이 높다는 게 같은 기관의 통계 자료가 말해주고 있다. 40대의 경우는 남성보다 여성 환자가 3배 많은 것에 반해, 10대는 남녀 비율이 거의 비슷할 정도. 이 숫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화병의 인문학』을 쓴 최성민 교수는 화병은 우리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키워드라고 했다. 지금 우리 화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도 우리는 비슷한 류의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같은 시대, 2021년을 살고 있으니까.
[글 김민정 사진 언스플래시 참조 『화병의 인문학』 (박성호·최성민 저 / 모시는사람들 펴냄)]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