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작은 고갯길이 품고 있는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이완우 입력 2021. 1. 1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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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우 기자]

옛날에는 고갯길이 많았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고지도를 보면 산을 넘어가는 길을 의미하는 재 또는 고개라는 의미의 치(峙), 현(峴)이 붙은 소지명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현재는 재나 고개를 의미하는 이러한 소지명은 점차 잊힌다.

고갯길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리운 추억 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학문을 연마한 시골의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향하며 넘던 길이었고, 이 고을 저 고을 오일장을 찾아 이동하는 장사꾼의 삶의 통로였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절에 몇십 리 떨어진 학교에 통학하는 학동들이 책보를 둘러메고 오르내리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주위 자연의 풍경이 달라지고 길옆에 핀 이름 모를 꽃들과 반갑게 만나는 순간이 늘 마련되어 있었다. 걷는 것이 바로 충실한 삶이었다. 그 걷는 시간이 그 걷는 시간만큼 삶의 마디로 헛되지 않게 걷는 사람을 성숙시키는 그러한 고갯길이었다.

고갯길은 산 이쪽에서 산 저쪽으로 점이 되는 변화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발달한 교통수단이 일상화된 오늘날은 고갯길의 풍경이 점차 없어진다. 고갯길에 도로가 잘 되어있어 자동차로 지날 때는 이곳이 고개인 줄도 모르고 그냥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함께 속도감 있게 이동할 뿐이다.

두곡 마을과 두실 마을 사이의 작은 고개 

임실군 임실읍 두곡리에는 몇십 호의 인가가 있는 두곡 마을과 두실 마을이 낮고 작은 고개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다. 두곡(杜谷) 마을과 두실(杜實) 마을 사이의 고개를 '장군 고개'라고 한다. 두곡 마을과 두실 마을이 이름의 의미는 같다. 고구려 말에 골짜기가 '실'이다. 이렇게 두곡이나 두실이나 골짜기를 막았다는 의미는 같다.

먼 옛날이 어떤 장군이 이 고개를 넘었다고 마을에는 구전된다. '장군 고개'라는 이름이지만 이 고개는 두 이웃 마을을 연결하는 길이 200m 정도 되는 자그만 고개이다. 이 고개에 그리 크지 않은 팽나무 두 그루가 고개 양 옆으로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처럼 마주하여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가끔 공들이는 분들이 이 나무에 금줄을 치고 제물을 드리고 치성하기도 한다.

이 마을의 지명인 '두곡(杜谷)'에는 지명 설화가 있다. 옛날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골짜기인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었다. 선비는 말을 나무에 묶어두고 하룻밤을 노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말이 죽어 있었다. 목이 마른 말에게 미처 물을 주지 않았다. 선비는 말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이 골짜기에 둑을 쌓아 물이 모이게 하여 말의 영혼이라도 충분히 물을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 개연성이 충분한 이야기 같지는 않지만 '골짜기를 막았다'라는 의미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설화다. '두곡(杜谷)'이라는 지명이 선견지명을 발휘한 것인지, 1970년대에 상당히 큰 저수지를 조성하는 공사가 있었다. 관개용 저수지를 흙댐으로 조성할 때 이 마을 사람들이 품팔이로 흙을 퍼다 부어 흙댐을 다졌다고 한다. 이 두곡저수지가 한때는 이름난 낙시터였다.

두곡저수지가 조선 시대 1597년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인 백의종군로의 길목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양의 의금부에서 풀려나 경상도 초계에 있던 권율 장군의 휘하 군졸로 부임하는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으신 백의종군로의 한 길목이다.

1597년 4월 22일 전주부성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슬치재를 넘어 오원역에서 점심을 드시고, 이곳 두곡마을 있는 곳을 지나 임실현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말재를 지나 오수역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몇 달 뒤 위대한 명량대첩을 이루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이 길이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전라 좌도, 경상 우도를 연결하는 어엿한 통영별로였다. 그러나 지금은 저수지의 찰랑대는 물결과 산새 소리만 한가한, 통행하는 차량이 거의 없는 잊힌 도로일 뿐이다.
 
▲ 장군 바위 장군 바위, 마이산 퇴적암
ⓒ 이완우
 
두곡저수지의 여수로 옆에 커다란 마이산 역암의 퇴적암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초가집 모양과 그만한 크기로 제법 위풍당당한 모양이다. 두곡 마을에는 이곳저곳에 마이산 역암이 산재한다. 동네 사람들은 두곡저수지 여수로 부근의 이 퇴적암 바위를 장군 바위라고 한다.

옛날에 한 장군이 지금 두곡저수지의 흙댐이 있는 건너편 산등성이에서 말을 달려 이쪽 바위까지 150m가 넘은 거리의 골짜기를 한걸음에 건너뛰었다고 한다. 장군이 탄 말이 골짜기의 저편에서 한걸음에 허공으로 뛰어올라 골짜기의 이쪽 바위에 말발굽을 내디뎠다고 한다. 그때 바위에 말발굽이 선명하게 찍혔는데 크기가 세로로 60cm 가로 40cm 깊이가 50cm 되는 말발굽 모양이다.

그런데 바위 위편에 말발굽 모양으로 팬 곳에 물이 항상 고여 있다. 물을 퍼내도 곧바로 찰랑찰랑 물이 고인다. 수맥이 닿을 리 없는 바위 위에 팬 곳에 물이 끊이지 않고 고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군의 말발굽이라는 설화를 간직하며 바위에 패인 구멍은 진안 마이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타포니 현상일 것이다. 봄여름에는 개구리 한두 마리가 이 작은 타포니 구멍을 자기의 영역으로 삼고 머무르며,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차가운 침묵으로 가만히 있다.

한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볼 수 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는 우리 향토 작은 마을 인근의 낯익은 풍경 속에도 수억 년 지질 시대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무심히 지나치던 길가의 작은 풀꽃들도 멈추어 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예쁘다. 우리 마을의 평범한 풍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터 잡아 살아온 우리 향토와 마을들은 이웃 마을로 이어지는 고갯길도 많다.

그 고갯길마다 우리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고 우리의 생활과 심성의 바탕을 이루는 DNA 씨앗처럼 품고 있는 설화들도 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볼 수 있다. 흔하게 보이는 바위에서 수억 년 지질 시대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 그 바위에 부착하여 생명을 이어가며 바위를 풍화시키는 이끼류의 선태식물과 지의류를 본다. 까마득하게 수억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질시대부터 이어오는 생명의 숨결을 느낀다.

따뜻한 봄이 되면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이 지역 향토 고갯길을 찾아 걸어 넘어보고 싶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인 그 고갯길에 마주치게 될 풍경이 기대된다. 이끼 낀 비석을 마주하면 풍화된 글씨를 읽어보고, 길옆에 다가선 암석의 노두를 만나면 암석의 얼굴을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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