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정치 읽기] 트럼프는 몰랐다, '갈라치기 정치'란 괴물을
이탈리아 사상사를 보면 특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혁명적인 사상을 전파한 이론가 중 적지 않은 수가 이탈리아 남부 출신이다. 예를 들어 ‘태양의 도시’라는 책을 집필한 초기 사회주의자이자 유토피아 사상가 톰마소 캄파넬라도 남부 출신이고, ‘헤게모니’라는 용어의 창안과 도입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그람시 역시 남부 출신이다.
이탈리아 혁명적 사상의 고향이 남부인 이유는 북부와 남부의 경제적 격차 때문이다. 이는 결국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의 지역감정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경제적 격차가 과거보다 줄었지만 현재까지 지역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이탈리아 지역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본 지역은 북부 지역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은 ‘유럽의 우한’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때 이탈리아 북부 지역이 의료진 부족과 장비 부족을 겪고 있었지만 남부 지역은 북부 지역을 위한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북부 지역 주민들이 코로나19를 피해 남부 지역으로 이동했을 때도, 남부 주민들은 이들을 바이러스 전파자 취급을 했다고 전해진다. 거꾸로 지난해 4월경부터 남부가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북부가 남부 사정을 외면했다. 이것을 보면 이탈리아 지역감정은 경제적 격차라는 이성적 차원에서 유래되기는 했지만, 결국은 감정적 차원의 갈등으로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감정적 차원의 갈등은 봉합이 매우 어렵다. 또한 이런 갈등은 ‘증오’로 무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갈등 강도가 훨씬 강력하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도 유사한 패턴이다. 지난 1월 6일 미국 의사당이 폭도들에 의해 4시간가량 점령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준다.
근본적인 원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 4년 내내 구사한 갈라치기 정치에 있다. 트럼프는 미국을 인종적으로 갈라치고, 종교적으로 갈라치고, 증오를 부추기는 데 주저가 없었다. 갈라치기 정치를 통해 트럼프는 집권 기간 내내 45% 이상 안정적인 지지율을 확보했다. 갈라치기 정치에 가장 중요한 수단은 증오, 음모론과 보여주기식 쇼였다. 트럼프 추종자들은 ‘이념적 착각’을 통해 타인에 대한 ‘증오’를 정치 행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증오’는 이성적 영역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에서 나오기에 그 힘이 막강하다. 지역감정 역시 감성적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쉽게 봉합되지 못하고 갈등의 골이 매우 깊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현재 미국의 갈등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갈라치기 정치라는 ‘증오의 정치’가 ‘광기’로 이어져 이번 미국 의사당 점거로 나타난 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의사당 점거 이후 미국 의회가 취한 행동이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여당인 공화당마저 수정헌법 제25조 발동을 주장하거나 트럼프 탄핵에 동조했다. 위기의 민주주의 앞에서 여야 구분이 없었다. 트럼프 4년이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최소한 미국의 시스템은 ‘정상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현재 미국 의회는 수정헌법 제25조 발효보다는 탄핵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통령이 그 직의 권한과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인지 판단해야 하는 수정헌법 제25조를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어서다.
트럼프 탄핵안은 하원을 통과했다. 이제 상원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대부분 공화당 의원은 트럼프가 다시 대선에 출마하거나 정치를 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래서 공화당은 대통령 불신임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듯 공화당 정치인도 트럼프 재기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트럼프가 탄핵이나 불신임당할 경우, 다음번 대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공화당 소속 정치인의 대선 가도가 좀 더 용이해진다. 트럼프 지지층의 결집도와 충성도가 대단한 만큼 트럼프가 다음번 대선에 도전할 경우 다른 공화당 대선 경선 주자들은 상당히 위축될 확률이 높다.
두 번째, 트럼프 행위를 두둔하거나 그냥 넘어가자고 하기에는 그의 행위의 해악성이 너무 크다. 미국은 대통령이 재임 시절 동안 잘못한 것이 있어도, 퇴임한 이후에는 거의 불문에 부치는 것이 관례였다. 예를 들어 콘트라게이트, 워터게이트를 비롯해 많은 게이트가 있었지만, 일단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에는 이런 사안을 다시 문제 삼아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집어넣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트럼프의 행위는 미국 근간을 흔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수의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은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한 의사당 점거를 일종의 쿠데타로 보고 있다. 쿠데타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반란 행위’는 기존 게이트와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때문에 퇴임 이후라도 트럼프에게 끝까지 죄를 물을 수밖에 없을 확률이 높다.
세 번째 이유는, 트럼프의 정치적 재기를 막는 것이 공화당 정치인의 ‘자율성’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트럼프가 아무 일 없이 퇴임한다면, 그의 지지층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속될 테다. 이때 공화당 의원 중 상당수는 트럼프 지지층 눈치를 보며 정치를 해야 한다. 즉, 의원의 독립적 판단에 의한 정치 행위가 트럼프 지지층에 의해 제약될 수 있는 셈이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정 정치인이 갈라치기 정치를 통해 진영을 만들고 충성도 높은 지지자군(群)을 만들 수는 있지만, 일단 진영과 지지층이 만들어지면 해당 진영에 속하는 정치인은 물론 ‘진영의 창조자’마저도 진영과 지지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즉, 만들 때는 특정 정치인 의지대로 만들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그 이후부터는 진영과 지지자의 ‘자율 논리’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갈라치기 정치를 한 이들은 자신이 만든 ‘진영과 극렬 지지자들’의 노예로 전락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처음부터 갈라치기 정치를 하지 않거나 갈라치기 정치를 했다면 최대한 빨리 청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여야를 막론하고 갈라치기 정치 행태가 어렵지 않게 목도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훗날 대선 불복이 발생하고, 특정 진영 지지자들이 국회나 다른 곳에 몰려가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미국의 작금의 사태를 일종의 선행학습 기회로 삼아 지금부터라도 갈라치기 정치를 척결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3호 (2021.01.20~2021.01.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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