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 않아도 마음은 전할 수 있다

김현진 2021. 1. 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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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를 읽고

[김현진 기자]

마음은 흘러서 어딘가에 닿고, 머물기도, 스쳐 가기도 한다. 며칠 전 보았던 영화 <채링크로스 84번지>에는 책과 편지를 통해 런던와 뉴욕을 오갔던 마음이 그려져 있다. 영화를 본 여운이 가시지 않아 오래 전 읽었던 책을 찾아 들춰보았다. 영화에서는 흘러가버렸던 대사들이 책에 고여 더 또렷하게 보였다.
 
 채링크로스 84번지 겉표지.
ⓒ 궁리
 
이 책은 작가 헬렌 한프 자신이 런던의 한 헌책방과 주고 받았던 편지 한 다발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뉴욕에 살고 있는 가난한 작가 헬렌은 우연히 신문에 실린 글을 보고 런던의 고서점으로 편지를 보내게 된다. 오래된 책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썼던 편지에 친절한 답장이 오고 그녀는 뉴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에 귀한 책을 얻게 된다.

그렇게 뉴욕에 사는 헬렌과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 마크스 & Co. 중고 서적의 프랭크 사이로 편지가 오간다. 1949년 10월 5일에 시작된 편지는 장장 20년간 지속된다. 도서 구입이라는 사업상 명목으로 시작되어 신뢰와 우정, 애정과 그리움으로 뒤바뀌는 편지가 시간과 함께 차곡차곡 쌓인다.

오래되어 낡고, 읽은 흔적이 있는 중고책에 기대어 위로와 기쁨을 얻고 영국 문학을 통해 영감을 얻는 헬렌. 그녀의 책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뉴욕에서는 "당신과, 당신의 오래된 영국 책들이란!"이라는 식의 핀잔을 듣기 일쑤다.

하지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프랭크만은 그녀의 까다로운 요구에도 "(물론!)절판인데, 깨끗한 중고본을 찾는 중입니다"라며 성실하고 진심어린 답변을 보내온다. 그리고 늘 더 좋은 책을 구해주려 애쓴다. 두 사람의 우정은 '책'을 통해 맺어졌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같았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우정도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다.

헬렌은 까다롭고 까칠하지만 특유의 유머로 사무적이었던 프랭크의 마음을 녹인다. 또한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했던 영국의 상황을 감안해 서점의 직원들에게 달걀이며 햄, 야채 통조림 등, 구하기 힘든 식재료를 보내는 따스함도 지니고 있다. 그녀가 보낸 음식은 서점 직원 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어지고 그들이 헬렌에게 감사 편지를 쓰면서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런던의 마크스 서점을 방문한 헬렌의 친구들도 헬렌의 친구라는 이유로 극진한 환영을 받는다. 천천히 책을 읽다 보면 편지가 오가며 사람들을 엮고 우정과 감사의 마음을 퍼뜨리는 과정이 마법처럼 느껴진다.

이 책은 참, 낭만적이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들여다보던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고 두꺼운 가죽 표지에 금박의 섬세한 장식이 수놓아진 고서적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한다.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고서점은 어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된 종이 냄새가 그윽하게 번지고 낡은 책장 사이로 빼곡히 책이 꽂혀 있는 서점을 떠올리다보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바람이 스며든다(아쉽게도 서점은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진정한 마법은 책을 읽은 우리에게서 일어난다. 나와 같은 마음의 모양을 가진 이가 어딘가에 꼭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지고 그이와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그리움을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만날 수 없고, 긴 시간 떨어져 냉혹한 시기를 보내야 하는 우리에게, 헬렌과 프랭크의 이야기는 잊고 있던 기적을 되새겨보게 한다. 우리는 떨어져 있지만 연결될 수 있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전해질 때 세상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고 말이다.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 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1969년 4월 11일, 헬렌, <채링크로스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출판사 궁리, 2015 )

편지를 쓰지 않은 시간 만큼, 마음을 쓰는 일에 서툴러졌다. 혼자일 때 마음은 맥없이 흘러가버리곤 한다. 하지만, 둘일 때 마음은 머물고 담기며, 가끔은 쌓이기도 한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무게를 싣는 만큼, 마음은 거기에 도착한다. 거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기도 한다. 마음도 눈처럼 내릴 것이다. 거기 있는 누군가의 마음에 눈처럼 내리고 싶다. 소복이 쌓여 가만히 귀 기울여주고 성실히 답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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